호모 파베르의 선택과 호모 로쿠엔스의 재현

- 『종이 동물원』(켄 리우)

by 세니사

문학사적으로 SF는 판타지 문학에서 분화되어 나온 소위 ‘장르 문학’이다. 다만, 논자 혹은 시대에 따라 SF를 판타지 문학의 일종으로 보기도 하고, SF와 판타지는 아예 종류가 다른 문학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켄 리우는 이 선집의 머리말에서 판타지와 SF를 구별하는 데 별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소설이란 “손쓸 수 없을 만큼 변칙적이고 무분별한 현실보다 은유의 논리를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전부”[7쪽]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인지 이 선집에는 굳이 분류하자면, SF라기보다 판타지로 분류될 만한 작품들도 있다. 그러나 켄 리우의 말처럼 작품들 하나하나가 SF냐 아니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가 창조한 은유들이 모두 놀랄 만큼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켄 리우의 소설 선집 『종이 동물원』에는 열네 편의 중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이야기마다 한 편 이상의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흥미롭고 쟁점이 풍부한 작품들이다. 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이 작품들 가운데 화두가 선명하게 교차하는 열 편의 작품들을 개괄하는 정도로 만족하려 한다.

열 편의 소설을 관통하는 질문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기술이 인간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일 때 인간은 흔히 어떤 선택을 하여 어떤 삶을 사는가. 나아가 이 삶의 재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이 질문은 인간이란 주체를 두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게 한다. 하나는 선택하는 주체(호모 파베르)고, 다른 하나는 재현하는 주체(호모 로쿠엔스)다.


1. 선택하는 주체

기술과 인간 - 「레귤러」, 「즐거운 사냥을 하길」, 「파波」

「레귤러」에서 루스는 신체 일부를 기계로 교체하고 최고의 이성을 발휘하기 위해 레귤레이터라는 정신 조절 장치를 사용한다. 기계를 믿지 않아 인질이 된 딸을 잃었던 루스는 제 몸을 기계화함으로써 위험 상황에 최선의 대처를 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몸과 정신을 개량한 것이다.

「즐거운 사냥을 하길」의 기계화는 이보다 더하다. 여우의 몸과 인간의 몸으로 자유롭게 변신하던 요괴 염은 기계화되는 세상에서 변신 능력을 잃는다. 심지어 타인의 폭력으로 머리를 제외한 신체의 모든 부분이 기계로 교체된다.

이 두 편의 소설에서 기술과 인간의 관계는 폭력적인 동시에 구원적이다. 「레귤러」에서 범죄의 희생자가 된 여성들은 ‘안구 임플란트’를 눈동자에 이식한 자들이다. 그녀들은 이 인공 안구로 자신을 찾아오는 단골(regular)들을 녹화한다.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한 안전책이지만, 만약의 경우 갈취용으로 쓰기 위해. 그런데 이 안구를 노린 범죄자에 의해 살해된다.

「즐거운 사냥을 하길」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초 염의 몸을 기계로 바꾼 자는 염의 의사를 묻지 않았다. 염은 생체가 잘려 나간 고통 속에서 기계 몸으로 능욕을 당한다. 그러나 결국 인간 량이 그녀의 머리를 기계로 바꾸어 주면서 그녀에게 변신 능력도 갖게 해 준다. 염은 그토록 염원했던 여우로의 변신이 가능해진 것이다. 다만 강철 여우로. 그런데 강철 여우가 되기 전, 후리징으로 불렸던 이 요괴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욕망이 빚어내는 자멸적 판타지이다. 그러니 또다시,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강철 여우 후리징이 어느 순간 인간에게 어떤 폭력을 돌려줄지도...

반면 「파波」에서 기계를 넘어 에너지가 되는 인간의 변신에 폭력은 없다. 작품 속 인물들은 처음에는 불사의 몸으로, 다음에는 싱귤레리티라는 집단정신으로, 종국에는 에너지의 패턴으로 변신한다. 이로써 우주의 한끝에서 다른 끝으로 종횡무진 이동하는가 하면,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기술과 인간의 관계가 이처럼 평화로운 데에는 이유가 있다. 기술을 이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구를 벗어나 우주로 펼쳐진 이 무형의 연대는 기술을 선택하지 않은 자에게 어떤 불이익도 없는 사회에 대한 켄 리우의 비전인지도 모르겠다.

기술의 폭력성과 가능성을 모두 보는 켄 리우는 기술이 어떻게 발달하든, 발달한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든, 결국 기술과의 관계를 선택하고 선택 이후를 살아내는 일이 인간의 삶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때로, 가진 게 없는 이들은 강요된 선택에 고통받기도 하는 그런 삶.


선택의 관계성 - 「모노노아와레」, 「상태 변화」

이 선집에 실린 작품들에서 선택은 기계와의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윤리는 아니다. 여기서 선택은 인간의 근본적 존재 양식이다. 존재 양식으로서 선택의 관계성을 명징하게 그려 보이는 작품은 「모노노아와레」와 「상태 변화」이다.

「모노노아와레」*에서 주인공은 우주선의 태양 돛에 뚫린 구멍을 수선하는 임무에 자원한다. 그런데 수선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는 자신을 희생하는 선택을 한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영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은 “단지 적당한 시점에 적당한 장소에 있었던 사람일 뿐”이며, “우리가 누구인지 정의하는 것은 타인들의 삶으로 이루어진 그물 속에서 차지하는 자리”(401쪽)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그물 속에서의 위치를 인식하고 수용하는 일이 실상 누구에게나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켄 리우는 선택의 관계성뿐 아니라 선택의 윤리에 대해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제 몫의 책임을 선택하고 감당하는 윤리.

한편, 「상태 변화」에서 몸은 영혼의 본질과 일체이다. 리나의 영혼은 얼음 한 조각이다. 이 얼음이 녹으면 그녀의 몸은 생명을 다한다. 그녀는 이 얼음 조각을 지키기 위해 일상을 벗어나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 소금 영혼의 남성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리나는 그와의 한순간 사랑을 위해 자신의 영혼이 녹을 수 있는 모험을 단행한다. 결국 그녀의 영혼은 녹아버린다. 그녀는 녹아버린 한 모금의 영혼을 마셔 버린다. 그녀는 죽었을까? 이어지는 리나 친구의 에피소드는 리나의 영혼은 얼음이 아니라 상태가 변하는 H2O일지 모른다고 암시한다. 리나는 이제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한 사람이 아니라 물처럼 상쾌하고 유연한 사람일 것이다.

인간은 특정한 ‘상태’가 아니라 상태 ‘변화’를 선택하는 주체라고 켄 리우는 이 작품에서 특히 강조하는 듯하다. 한 가지, 리나의 선택이 소금 영혼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점을 환기하자. 켄 리우에게 주체의 선택은 늘 관계 안에서 작동한다.



2. 재현하는 주체

재현하지 않는 주체-「천생연분」

〈천생연분〉에서 기계의 알고리즘은 사용자 인간의 일상을 기록하고 계산하여 사용자 인간에게 최적의 선택지를 제안한다. 이제 기록은 전적으로 기계의 몫이어서 인간은 가족의 전화번호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최적의 선택지를 제공받는 인간은 기록(재현)하는 주체가 아닌 것이다. 기록은 자동화되고, 인간은 그 결과를 소비하며 안전하고 편안하다.

그런데 이 편안하고 안전한 알고리즘 안에서 일부 인간들이 흔들린다. 이 안전과 편안이 뭔가 의심스럽고 불만스럽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그런 존재가 아닐까. 스스로 선택하고, 제 선택의 결과를 감당함으로써 주체성을 실감해야 하는 존재. 작품이 묻는 바이다.


말해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 「송사와 원숭이 왕」,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종이 호랑이」

때로, 재현은 공동체의 역사와 관련 있다. 이때 재현은 말해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문제를 갖게 마련이다.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에서 찰리는 태평양 횡단 터널 건설 현장에서 10년 이상 일했다. 그의 이름은 건설에 참여한 이들을 기록한 광고판에 새겨져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비밀이 있다. 그 공사 현장에 강제로 끌려와 끝내 죽고만 죄수들에 대한 기억. 결국 찰리는 광고판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그 자리에 사슬 이미지를 새긴다. 강제 노역으로 끌려와 죽어간 죄수들을 상징하는 사슬. 말해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재배치, 재현하는 주체의 선택이다.

하지만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해지는 것의 자리에 두려 할 때 혹독한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 「송사와 원숭이 왕」에서는 이 문제를 극단적으로 형상화한다. 송사 전문가 전호리는 1645년 청군이 자행한 학살을 기록한 금서 양주십일기를 지키려 하는 자의 도망을 돕는다. 이 선택은 체포와 고문 그리고 참혹한 방식의 처형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전호리는 자신이 한 일을 거짓되게 재현함으로써, 말해질 수 없는 재현을 보존한다. 전호리는 권력자들이 재현을 두고 벌이는 그 방법-은폐와 조작-을 그대로 사용해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지킨 셈이다.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에서 켄 리우는 이 문제를 확장한다. 뵘기리노 입자*를 이용한 관측 장치는 특정 시점의 과거를 직접 목격하게 만든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재현은 실패한다. 과거를 본 유족들은 전문 훈련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말할 자격이 없는 자가 되고 그들이 본 것은 사적 믿음으로 격하된다. 역사는 더 이상 이야기의 문제가 아니라, 발화 자격의 문제가 된다. 하지만 작품의 결론부에서 서술자는 진실은 부정된다고 훼손되지 않는다, 진실은 아무도 진짜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숨을 거둔다고 말한다. 이 서술은 「종이 호랑이」에서 제기된 질문, 억압된 목소리의 고통에 대한 답이다. 재현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회가 어떤 목소리를 ‘진짜 이야기’로 인정하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재현과 인간—「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

이 작품에서 온갖 생명체들이 무엇을 재현하고, 어떻게 재현하느냐는 각기 다르다. 이들 가운데 한 종은 아무도 읽지 않을 기록을 남긴다. 이 기록은 권력이 되지도, 상품이 되지도 않는다. 재현은 다만 존재 그 자체일 뿐이다. 켄 리우는 여기서 재현을 모든 거대 담론에서 분리하여, 다만 지적 생명체의 본질로 그려낸다. 재현이 현실에서 온갖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오용된다 하더라도, 사실은 인간의 아름다운 본질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켄 리우에게 선택하는 주체와 재현하는 주체는 인간의 다른 측면이 아니다. 선택은 재현으로 이어지고, 재현은 다시 선택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켄 리우가 말하는 인간은 이런 존재인 듯하다. 기술이 아무리 많은 가능성을 제시해도, 끝내 인간은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이 사라지지 않게 할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존재라고.


* 모노노아와레 : 삶의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지는 감정 [388쪽]

* 뵘기리노 입자 : 물리학 지식을 기반으로 켄 리우가 창조한 상상의 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