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하고 모호하며 비결정인 세계

- 『바르도의 링컨』(조지 손더스 지음)

by 세니사

조지 손더스가 그려낸 세계는 쓸쓸하고 모호하다. 『바르도의 링컨』에서 1860년대 미국과 링컨의 내면은 무엇 하나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흔들린다.


바르도

역자 정영목에 따르면 ‘바르도’는 티베트 불교에서 죽은 자의 영혼이 다음 생을 받기 전까지 머무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바르도는 추상적 상태라기보다 묘지라는 물리적 공간에 겹쳐 존재하는 세계로 그려진다. 묘지는 산 자들의 공간에 겹쳐 있으면서 동시에 떨어져 있는 곳이다. ‘바르도’는 딱, 이런 모호함으로 가득하다.

이곳에서 한 인물의 목소리는 곧잘 다른 인물의 대사를 대신한다. 그래서 독자는 문득 혼란에 빠진다. 누구의 말인가.

집단 강간 후 살해된 듯한 소녀는 현실에서 강간을 당한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다. 사실은 무엇인가.

마침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윌리엄 월리스 링컨은 어디에도 없고 모든 곳에 있다. 그는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이 모호함이 바르도에 한정되지 않는다. 산 자들의 공간에서도 마찬가지다.


윌리엄 월리스 링컨, 즉 윌리가 죽던 날 보름달이 떠 있었다는 이가 있고 초승달이 떠 있었다는 이가 있는가 하면 매우 흐려 달이 없었다는 이가 있다.

그런 날 죽은 윌리 링컨이 더없이 우아하고 다정한 소년이었으며 수의로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수의로 갈색 양복을 입고 있었으며 평소 매우 고집스럽고 버릇없고 방종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한편, 어떤 이는 살아 있는 에이브러햄 링컨이 평생 봉사의 삶을 산 훌륭한 대통령으로 세계가 경탄하는 두뇌를 가졌으며 흑인의 슬픔과 백인의 슬픔에 모두 공감했을 뿐 아니라 사람이건 짐승이건 괴로움에 시달리는 모든 존재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갔다고 말한다. 반면 그가 천치고 위선적이고 예의 없으며 허영심으로 대통령이 되었으나 정치적 재능이 없어 결국 조국을 전쟁에 빠뜨렸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인간의 정신은 본질적으로 모호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아니면 세계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모호한 곳일까. 양자 모두일 수도.


비결정성

또 다른 흥미로운 설정은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깨달은 영혼이 바르도를 떠나는 순간, 존재의 상태이다.

형체가 양피지처럼 얇아지고 떨리면서 생전에 그가 가졌던 다양한 자아들이 깜빡거린다. 그런데 이내 그가 가져본 적 없는 “미래-형체”들이 깜빡인다. 그리고 사라진다. “물질빛피어나는 현상이 세 번 눈부시게 폭발”하고 “뼈-오싹하는 불소리가 세 번 속사포처럼 반복”되면서. 그렇게 사라진 혼들이 과연 어디로 갔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확정되지 않은 미래의 깜빡임과 도착지를 알 수 없는 이동은 죽은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사태가 아니다. 어린 자식이 죽은 고통뿐 아니라 자신의 결정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전장의 소식으로 고통받는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계속해 낼 거야, 계속. (...) 하느님은 이 문제에서 어느 편에 서실까? (...) 우리는 하느님을 ‘그분’(직선적으로 보답을 주는 어떤 존재)이 아니라 ‘그것’으로 봐야 해.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거대한 짐승으로. 그것은 우리한테서 뭔가를 원하고, 우리는 그걸 주어야만 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건 그걸 주는 마음과 그렇게 주는 일이 기여하는 궁극적 목적뿐이야. 그것은 우리가 어떤 목적에 기여하기를 바랄까? 모르겠어. 그것이 원하는 건, 당장은, 피, 더 많은 피인 것 같아. 그렇게 해서 상황을 현재의 상태에서 그것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바라는 상태로 바꾸는 것. 하지만 그 새로운 상태가 어떤 것인지, 나는 모르겠고, 인내심을 갖고 차차 알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어. [442~443쪽]


작품 바깥에서, 어떤 역사학자들은 링컨이 무엇보다 흑인을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을 불사했다고 한다. 또 다른 역사학자들은 링컨이 강한 미국을 위해 연방들의 독립을 좌시할 수 없었기에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한다. 손더스의 작품에서 링컨은 ‘목적’을 알지 못한다. 전쟁이라는 엄청난 결정을 할 때조차, 인간은 그 동기와 방향을 확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토록 많은 희생을 치르는 전쟁 중에 바르도에 온 한 백인과 한 흑인은 죽은 후에조차 싸움을 멈추지 못한다. 그들을 지켜본 한 인물은 “현실에 어떤 근본적이고 상상도 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난다면 몰라도”[458쪽], 둘의 싸움은 영원하리라 생각한다.


목적이 명확하다 한들 결과가 목적에 닿는다는 보장은 물론 없다. 더욱이 현실의 어떤 일이 한 가지 목적만을 바라 일어나지 않으니 그 전쟁이 과연 목적한 바를 이루었는가에 대해 쉽사리 판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난 지 150년도 한참 지난 오늘 이 시간에도 미국에서 흑인과 백인의 갈등은 여전한 이유는 그 전쟁이 진정 ‘흑인과 백인’의 갈등이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싸움을 멈출 수 있는 “어떤 근본적이고 상상도 할 수 없는 변화”는 인종 차별에 한정된 변화가 아닐 것이다. 어느 역사학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에이브러햄 링컨이 꿈꾸었던 ‘강한 미국’의 오늘을 보아도.


SF인가

『에스에프 에스프리』에서 셰릴 빈트가 정리한 전통적 과학소설의 정의(과학적 외삽, 기술 문화에 대한 응답, 과학 패러다임과의 변증법)를 엄밀히 적용하면 『바르도의 링컨』은 SF라기보다는 역사소설과 환상적 리얼리즘이 결합된 실험적 서사에 가깝다.

그러나 다코 수빈(Darko Suvin)의 ‘인지적 소외’나 빈트가 소개한 ‘사변소설’의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현실과 급진적으로 다른 세계(바르도)를 통해 현실의 폭력과 슬픔을 낯설게 바라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분명 ‘SF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바르도의 링컨』은 SF의 중심 장르라기보다는, SF가 포괄하는 넓은 사변적 서사 영역—즉 SF의 인접 지대에 위치한 작품이라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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