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스에프 에스프리』(셰릴 빈트 지음)
이해를 위하여
원래, 이번 화의 대상 텍스트는 조지 손더스의 『바르도의 링컨』이었다.
꽤 오랜 시간 SF에 관심을 가져왔으나 작정하고 읽지는 않았기에 이번 연재를 기획하면서 세 종류의 생성형 인공지능들의 도움을 받았었다. 이번 SF 읽기에서 나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인공지능들로부터 작품들을 추천받았고 그 가운데 일부를 선정했던 것이다. 나의 선정 기준은 세 인공지능의 중복 추천과 내가 아직 읽지 않은 문학 작품이었다.
『바르도의 링컨』은 이 두 선정 기준을 모두 통과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막상 작품을 읽으면서 한 가지 의문에 붙들려 절반쯤 읽은 시점에 결국 책을 내려놓았다.
이 작품이 대체 왜 SF인가?
내게 이 작품을 추천했던 인공지능들에게 물으니 이런저런 답변을 내놓았다. 그런데 답변들에 나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근거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박사 과정에서 갑자기 전공을 바꾼 덕에 입학부터 논문 완성까지 9년이 걸렸다. 9년 동안 읽은 수많은 이론서들은 세상과 작품을 보는 눈을 넓혀주면서 동시에 제한했다. 박사 학위를 받은 문학 분야에 속하지만, 내가 잘 모르는 SF 분야에 입문하며 이론을 내려놓기로 한 데에는 그 ‘제한’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보는 눈을 넓히기 위해 이론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여, 『바르도의 링컨』 읽기를 중단하고 『에스에프 에스프리』를 집어 들었다. 처음 읽은 SF 이론서에서 내가 잠정적으로 찾은 ‘SF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이렇다.
개념 정의에 대한 입장
『에스에프 에스프리』는 과학소설을 명쾌히 정의하고 설명하지 않는다. 이 책은 과학소설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경쟁해 온 여러 개념과 해석, 독자 공동체와 출판문화, 비평 전통과 미학적 실천을 두루 살피면서 이 장르의 “총체적이지만 완벽하지는 않은 모습”에 접근하려는 시도이다.
저자는 과학소설이라는 장르를 텍스트, 모티프, 주제, 이미지가 서로 얽히고 다시 연결되는 하나의 그물망으로 이해한다. 이에 따라 그는 과학소설을 둘러싼 다양한 정의와 실천을 횡단하며 그 복합성을 드러내는 비평적 지도를 제시한다.
주요 개념들
저자는 장르 이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몇 가지 중요한 비평 개념을 소개한다. 그중 가장 영향력 있는 개념은 다코 수빈의 “인지적 소외”이다.
수빈에 따르면 SF는 독자가 사는 세계와 급진적으로 다른, 낯선 세계를 제시한다. 하지만 그 ‘낯섦’은 사유 가능한 가능성에 근거해야 한다. 이때 핵심은 ‘소외’와 ‘인지’가 함께 작동한다는 점이다.
독자는 이 낯선(다른) 세계를 마주하며 자신이 당연하게 여겼던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 그 낯섦을 기괴함이 아니라 사유 가능한 조건의 변형으로 이해한다. 이 효과를 만들어내는 장치가 ‘노붐novum’이다.
노붐은 텍스트의 세계와 독자의 세계 사이에 차이를 발생시키는 핵심 요소다. 중요한 것은 이 차이가 이야기의 장식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바꾸는 지배적 요소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 개념은 과학소설을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비판의 수단으로 이해하게 해 준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최근 비평에서는 감정과 정동이 강조되면서, 수빈의 정치적·인지적 틀만으로 모든 SF를 설명할 수 없다는 도전이 제기되고 있다.
장르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는 또 다른 용어는 “메가텍스트”이다. 데이미언 브로데릭이 만든 이 개념은 SF가 하나의 작품만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 분야에서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도상, 비유, 배경 설정, 관습, 상호텍스트적 기억 속에서 생산되고 읽힌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독자는 우주선, 시간여행, 인공지능, 디스토피아 같은 표지를 만나는 순간 그것이 불러오는 장르적 배경지식을 동원하는 것이다.
브라이언 애트버리는 이 개념을 더욱 발전시켜 SF를 고정된 공식이 아니라 열린 “포물선”으로 설명한다. 익숙한 도상이 서사의 출발점을 제공하지만, 이야기가 어디로 뻗어 갈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그래서 SF는 반복되는 장르이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새롭게 변주되는 장르다.
하위 장르와 대체어
하위 장르의 측면에서 과학소설은 폭넓은 분화를 보여 준다.
먼저 하드 SF는 동시대 과학 지식과 논리적 외삽을 강하게 중시하는 전통으로, 과학적 정확성과 자연과학 중심의 상상력이 핵심이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사회문제와 문화적 갈등을 중시하는 작품들이 등장하면서, 과학소설의 중심은 기술적 문제 해결이 아니라 사회적·철학적 성찰로 확장되었다.
1960년대에는 이러한 확장과 함께 “사변소설”이라는 말이 ‘과학소설’의 대체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사변소설”은 기술 변화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변화, 비합리적이고 정서적인 경험, 심지어 현실 자체의 불안정성까지 포괄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어서 정보기술과 네트워크 사회의 불안을 표현한 사이버펑크가 등장했다. 그리고 인공지능·두뇌-컴퓨터 인터페이스·포스트휴먼 전환을 사유하는 특이점 소설도 중요한 하위 장르로 부상했다. 이는 SF가 당대 기술 문화와 결합하면서도, 기술 예찬에 머무르지 않고 불안, 소외, 통제, 인간성의 재구성을 함께 다루어 왔음을 보여 준다.
한편 페미니즘 SF와 퀴어 SF는 황금기 과학소설이 주변화했던 여성과 젠더 문제를 장르 중심으로 끌어왔다. 도나 해러웨이의 논의처럼 SF는 문제적 자아와 예기치 않은 타자 사이의 경계가 침투하는 장소이며, 사이보그 글쓰기는 순수성의 신화가 아니라 생존과 저항의 도구를 획득하는 실천이다.
마찬가지로 인종과 민족의 문제를 다루는 최근의 개입들은 SF가 누구의 미래를 상상해 왔는지, 그리고 누구의 목소리를 배제해 왔는지를 다시 묻게 만들었다.
결국 『에스에프 에스프리』가 보여 주는 과학소설은 하나의 정의로 닫히는 장르가 아니다. 그것은 과학과 기술의 새로움에 반응하면서도, 그것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힘과 인간 조건의 변화를 사유하는 방식이다.
다양한 SF 개념들의 교차점
과학소설에 대해 경쟁하는 정의들 사이에서 저자가 포착하는 공통점은 ‘변화’에 대한 관심이다. 브룩스 랜던을 인용한 해설에 따르면 과학소설은 변화를 주제와 목적으로 삼는 문학이다. 과학기술이 일상과 인간 조건을 어떻게 바꾸는지, 그러한 변화가 철학적 개념과 사회 질서에 어떤 균열을 일으키는지, 그 변화가 미래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이야말로 SF의 중심 충동이라는 것이다.
즉, SF는 하나의 엄밀한 본질로 정의되기보다 과학기술과 사회 변화에 반응하며 변형을 거듭하는 장르이고, 많은 정의들 사이에서 공통으로 남는 것은 바로 변화의 과정과 결과에 대한 집요한 관심이다.
과학소설은 변화의 문학이며, 현실을 낯설게 보게 함으로써 우리가 현재를 다시 읽고 미래에 개입할 수 있도록 만드는 상상력의 장소이다. 다시 말해 SF는 기술, 주체성, 역사, 사회적 힘, 그리고 더 나은 세계의 가능성을 함께 사유하게 하는 문화적·정치적·미학적 실천이다.
남은 과제
이로써 『바르도의 링컨』을 SF의 관점에서 해석할 여지가 마련되었다. 여전히 과연 ‘SF인가?’라는 의문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SF라고 해석하는 이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는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다음 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