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니 빌뇌브의 <블레이드 러너 2049>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벽’
도입부에서 경찰국장 조시는 두 존재를 가르는 ‘벽’이 있다고 말한다. 두 존재를 가르는 벽은 ‘태어났느냐, 만들어졌느냐’이다. 이 벽에 의해 인간은 태어난 존재로서 ‘진짜’이고, 리플리컨트는 만들어진 존재로서 ‘가짜’인 것이다.
그에게 벽은 세상의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필수 장치다. 그러니 질서를 교란하는, ‘태어난 리플리컨트’는 사라져야 한다. 조시의 판단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이다.
그런데 정작 리플리컨트를 생산하는 월레스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노예 생산의 효율성을 위해 생식하는 리플리컨트가 필요하다. 그래서 ‘태어난 리플리컨트’를 찾으려 한다. 월레스에게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벽’은 ‘출신’인 셈이다. 월레스의 판단은 경제적이거나 권력적이다.
조시의 기준이든 월레스의 기준이든 ‘벽’은 엄연하다. 그런데 이 ‘벽’은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며 명확히 붕괴된다. 거짓말을 못하도록 프로그램된 리플리컨트 러브가 경찰국장을 죽이기 직전, 자신이 월레스에게 할 거짓말을 예고하는 장면에서이다.
주인에게 복종하는 노예로 만들어진 리플리컨트가 스스로 판단하여 주인을 속일 뿐 아니라, 강력한 ‘힘’으로 벽 너머의 존재를 살해하기까지 하니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벽’은 존재론적 경계가 아니라 실상 권력이 구축한 경계선이었던 셈이다.
‘진짜’는 없다?
주인과 노예를 나누는 벽을 부수어버린 영화는 거듭하여, ‘진짜’에 대한 기준을 세우고 다시 부순다. 영화에서 또 하나의 강력한 ‘진짜’는 리플리컨트가 낳았던 아이다. 영화 초반에 리플리컨트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은 ‘기적’으로 규정된다.
기적의 아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발견한 이는 주인공 K이다. 그는 기적의 아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바로 그곳에서 발견한 숫자와 자신의 기억 속 목각 말에 새겨진 숫자가 동일하다는 사실을 안다.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게 된 K는 메모리 메이커 아나를 만나러 간다. 그는 아나에게 어린 시절에 대한 자신의 기억이 ‘누군가의 진짜 경험’이라는 말을 듣는다. 이로써 그는 자신을 기적의 아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관객은 진실이 너무 일찍 밝혀졌기에 아무래도 의심스럽다. 아니나 다를까!
리플리컨트 제조사의 회장 월레스는 예전에 생식이 가능한 리플리컨트가 제조된 적 있었지만, 타이렐사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제조법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레이첼과 데커드가 아이를 낳은 사건은 기적이 아니라, ‘알고 보니’ 기적이 아니라 설계의 가능성이 된다.
더욱이 ‘진짜’라고 확인받은 K의 기억은 ‘알고 보니’ K의 경험이 아니라 아나의 경험이었다. 진짜 기억이 복제되고 이식된 것이다. 이런 식의 해체는 여러 에피소드에서 반복된다.
K를 사랑하며 ‘조’라고 불렀던 증강 현실 여인은 K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에게 특화됨으로써 적어도 그에게만큼은 유일한 존재가 된 듯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아니었다. K의 그녀는 무수히 많은 ‘조이’였고, 그 ‘조이’들은 유혹해야 할 남성을 으레 ‘조’라고 부르는 듯하다. 그러니 K에게 특화된 그녀의 사랑은 변형 복제된 상품이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데커드가 레이첼에게 한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 일조차 제조사의 프로그램이었을 수 있다지 않은가! 두 사람의 사랑 또한 진짜가 아니라 0과 1이 만들어 낸 환상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영화는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진짜’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것일까?
그보다는 우리가 흔히 진짜라고 판단하는 ‘기준’들을 해체하는 사고 실험을 하는 듯하다.
인간이 아니라 인간성
인간의 특성, 존재의 유일성, 기억의 경험성, 권력의 독점성, 감정의 진정성...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온갖 기준들을 해체한 영화가 궁극적으로 탐구하고자 한 바는 진짜 ‘인간성’인 모양이다.
K는 자신이 기적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 증강 현실 그녀의 사랑이 복제된 상품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는 유일하지 않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의 온갖 것이 그렇다.
그런데 바로 이 이해 안에서 그는 선택을 하고, 선택의 실행에 목숨을 건다.
왜?
리플리컨트로서 인간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여 모두의 희망이 되기 위해서도, 자신이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자신이 ‘기적의 아이’가 아니라는 허탈함을 ‘올바른 행위’로 메우려 한 것인지, 순수하게 ‘올바른 행위’를 납득했기 때문인지 우리는 명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자신에게 무익한 책임을 떠안은 행위를 마친 후 눈 내리는 계단 위에 누워 하늘을 보고 죽어가는 그의 모습에서 관객은 ‘인간다워 보이는 그’를 본다. 이름 없는 ‘자’라 해도.
이 지점에서 영화는 ‘인간’을 해체하고 재정의한다. 인간은 태어나는 것도, 엄연한 것도, 분류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인간성을 실행하는 순간, 즉 ‘올바름을 지향하는 행위’로만 존재한다. 인간이 아니라 인간성을 지닌 그 무엇으로.
더욱이 자신의 기억이 아나의 경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데커드를 구하여 아나에게 인도하는 선택을 한 순간, K는 누군가의 슬픔에 공명하는 인간다움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진짜’란 무엇인가?
영화는 진짜 혈통, 진짜 기억, 진짜 사랑, 유일성을 세우는가 싶더니 부수었다. 남은 것은 단 하나, 자신에게 무익하나 올바른 선택이다. 그러니 진짜는 태생이 아니라 책임이고, 유일성이 아니라 윤리적 지향이며, 타인의 슬픔에 대한 공명인 셈이다.
결국 영화는 인간의 개념을 확장한다기보다 인간의 개념을 해체한다. 동시에 인간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어떤 측면에서는 한층 좁고 엄격한 기준으로 인간성을 재정의한다. 인간성은 본질이 아니라 수행이며, 그 수행은 공감에 기반하여 올바름을 지향할 때 아름답다.
그러니 영화는 ‘진짜가 사라진 디스토피아’를 그렸다기보다 ‘진짜의 정의를 이동시키는 서사’다. 차가운 세계에서 쓰러져 죽어가는 K는 ‘태어난 인간’이 아니라 인간성을 향해 ‘되어 가는 인간’이자 타인의 슬픔에 공명하는 ‘인간다운 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