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치 디스패치>, 웨스 앤더슨 (2021) 리뷰
프렌치 디스패치
감독: 웨스 앤더슨
출연: 틸다 스윈튼, 프랜시스 맥도맨드, 빌 머레이, 제프리 라이트, 애드리언 브로디 외 다수
별점: 3/5
20세기 초 프랑스에 위치한 오래된 가상의 도시 블라제. 다양한 사건의 희로애락을 담아내는 미국 매거진 ‘프렌치 디스패치’. 어느 날, 갑작스러운 편집장의 죽음으로 최정예 저널리스트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마지막 발행본에 실을 4개의 특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술관 혹은 박물관에 온 것만 같다.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며 든 첫 번째 생각이었다. 실제로 영화는 미술관처럼 아름다움으로 가득하고 박물관처럼 과거의 향수가 넘실거린다. 이는 웨스 앤더슨 특유의 스타일과 미학을 만나 늘상 그랬듯이 훌륭한 영상미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 이후 남는 건?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사실 필자는 오프닝 시퀀스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이걸 볼 거라면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지 왜 '극장'에 온 거지?
<프렌치 디스패치>를 관통하는 주제는 '노스탤지어'다. 웨스 앤더슨이 뉴요커 지에 보내는 헌사와도 같은 이 영화는 20세기 인쇄 매체에 대한 향수와, 그것이 끝나버린 오늘날의 시대로의 극복에 대하여 다루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타블로이드 냄새 가득한 미술관 혹은 박물관에 노스탤지어의 렌즈를 투과시키고자 한다. 과연 웨스 앤더슨은 그 작업에 성공했는가? 필자의 생각은 회의적이다. 아름다움이나 연출 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이 작업물이 전혀 '영화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앤더슨의 팬들에게는 가슴 아픈 말일지도 모르지만, 이쯤에서 확실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겠다. 웨스 앤더슨은 매너리즘에 빠졌다.
무엇이 그를 매너리즘에 빠뜨렸는가. 아니, 정확히는 왜 필자는 그가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생각하는가. 한 번 그의 대표작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비교해보자. 본 작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공유하는 바가 많다. 경험되지 않은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라는 맥락에서도, 환상적 요소를 통해 현실을 환기한다는 맥락에서도 그렇다. 예컨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69년생인 웨스 앤더슨으로서는 결코 경험해보지 못했을 20세기 초에 대한 향수를 환상적으로 재전유하는 작업이라면 <프렌치 디스패치>는 정신이상 범죄자이자 천재 예술가의 행보, 68 혁명기의 학생운동, 경찰청장 아들의 납치 사건처럼 20세기 초중반 당시 타블로이드지에서 특종으로 보도했을 법한 세 편의 기사를 느슨한 옴니버스 형식으로 그려내어 (웨스 앤더슨의 주장에 따르면) 이제는 지나버린 인쇄 매체 시대에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 영화가 공유하는 수많은 지점에도 불구하고 이 두 편의 영화들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비슷하게 느슨한 구성으로 연결된 이야기였음에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지극히 '시네마적'이었으며, <프렌치 디스패치>는 그렇지 못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후속작으로서, 본 작은 노스탤지어라는 주제의식을 계승하면서도 확장시켜 그것의 극복을 다루고자 한 듯하다. 그것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 죽은 편집장인 아서 하위처 주니어의 추도사에서 언급되는 "이야기의 시대는 끝났다."는 맥락의 문장들이다. 경험하지 못한 과거의 노스탤지어의 환상은 언제나 달콤하지만, 우리는 이제 지나버린 인쇄 매체의 시대를 건너 다시금 오늘날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마무리에는 너무나도 근거가 빈약하다. 당장 프렌치 디스패치 사의 롤모델이 된 뉴요커만 해도 현재까지도 멀쩡히 발행되고 있으며, '이야기의 시대'는 다른 맥락으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재창조될지언정 결코 끝나지 않은 탓이다. 과대해석일지도 모르나 필자는 이 문장이 어쩌면 연출적 실어증에 휘말린, 매너리즘에 빠진 웨스 앤더슨이 관객들에게 보내는 메타 발언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또한 노스탤지어를 표현하고 그것의 극복을 말하는 방식 자체도 그다지 탁월하지 않았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그리는 노스탤지어가 웨스 앤더슨 특유의 연출과 맞물려 시너지를 얻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프렌치 디스패치>의 그것은 오히려 "굳이 이런 방식으로 표현할 이유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웨스 앤더슨의 스타일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경험되지 못한 과거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는 쿠엔틴 타란티노가 <펄프 픽션>을 통해 보여준 작업만 못했으며, 노스탤지어의 극복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홍상수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등의 영화를 통해 그려낸 작업이 훨씬 탁월하게 느껴질 정도였던 탓이다.
종합하자면 <프렌치 디스패치>는 웨스 앤더슨 특유의 스타일을 정점으로 쌓아 올린 작품임에도 영화 내적 주제의식과 애티튜드는 전작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퇴보한, 웨스 앤더슨의 한계점을 보여준 작품이다. 본 작은 영화가 영화여야 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해 매너리즘에 빠졌으며 그가 극복하고자 한 노스탤지어는 "이야기의 시대는 끝났다"는 무책임한 발언처럼 끝내 극복되지 못할 것이다. 웨스 앤더슨은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것을 시대의 문제인 양 책임소재를 돌리고자 한 듯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연출적 무책임은 이 영화의 보다 큰 문제를 야기했다. 그는 끝내 빈 껍데기 같은 영상미만이 우두커니 남은 한 시간 사십 여분짜리 영화와 함께 이야기꾼으로서의 그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를 담담히 받아들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