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정치
‘시인’과 ‘정치’라는 단어를 한 줄에 올려 놓고 보니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흔히 문약(文弱)이라는 단어를 듣고 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시인이다.
몇 달 전 출판사 사장님과의 술자리에서 “나는 아직도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가 무슨 의미인지, 박인환은 의미를 내재하여 그 시를 썼는지도 의심스럽다.”는 비판을 떠올리니 어쩌면 문약은 시인의 전유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반면 정치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명분, 모략, 공학, 짬짬이,... 뭔가 음험하고 흔한 직업의 세계가 아닌 어떤 특수계급의 그들만의 세계를 그리게 된다.
다시 생각해 봐도 ‘시인’과 ‘정치’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편견과 선입견을 깨부수는 시인들이 적지 않다.
우선 김수영 시인의 시를 보자.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최근 수 차례의 촛불집회에서 출렁이는 촛풀의 물결을 보며 많은 이들이 떠올린 시가 어쩌면 김수영 시인의 ‘풀’이 아니었을까 싶다.
1960년 4.19 혁명을 통해 시민들이 이승만을 권좌에서 끌어 내렸을때 “우선 그 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던 김수영은 “김일성 만세”라는 시를 통해 한국언론의 자유는 “김일성 만세”라고 할 수 있는데서 시작한다고 했다.
종북몰이 사상검증을 비꼬며 “김일성 개새끼”를 농담처럼 외치는 우리 시대의 SNS가 김수영의 DNA를 물려받은 것은 아닌가 싶다.
김수영 뿐인가?
이번엔 이선관 시인의 시 몇 개를 보자.
“번개시장에는 번개가 없고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고
국화빵에는 국화가 없고
정치판에는 정치가 없네.”
“지금 이 땅에는
좌익을 흉내내는 좌익적 우익이 있고
우익을 흉내내는 우익적 좌익이 있을 뿐
진짜 좌익과 우익을 말하는
싱싱한 사람이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 곳곳에서는
칠초마다 어린이가 한 명씩 굶어 죽는데
서울 부자동네 국회의원이 단식을 하신단다
제발 웃기는 짓 좀 그만하시라.”
그의 시는 몇 십년전의 시어가 아니라 이선관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트위터에서 누군가 올린 글이라고 하면 믿을 정도로 살아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시인은 도종환이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방울 없고 씨앗 한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그는 ‘담쟁이’라는 시를 통해 이미 시민의 혁명을 예상했을까?
아니 자신이 담쟁이가 되어 자본과 기득권자들이 만들어낸 절망의 벽을 오르는 국회의원이 된 순간 그는 글에서 걸어나와 투사가 되었다.
다시 한 번 자문한다. 시인은 문약한가?
절대 그렇지 않다. 편견과 선입견이 만들어낸 착각이었을 뿐이다.
2016년 12월 9일, 국회는 여섯 차례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모인 시민의 뜻을 받아들여 박근혜 탄핵안을 가결했다.
이제 다시 한 번 자문 해 보자.
여전히 현실은 시궁창인가? 아마 우리는 안될꺼야. 라는 자조는 더 이상 들리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번 시민 혁명의 가장 큰 소득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거라는 나약과 무기력을 깨치고 자신의 힘을 각성한 시민들에 있을 것이다.
박근혜 탄핵소추안 가결을 보며, 분명 후세의 시인들에 의해 칭송될 2016년 시민 혁명에 동참했던 많은 동지들께 존경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