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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민물게

6개월 회고록

by 체리

20240912


어느 겨울 새벽 당신이 내게 사실 자기는 글을 쓴다며 브런치 링크를 보내줬던 일이 떠오릅니다. 그 시기의 저는 철옹성처럼 냉정해보이던 당신이 자신의 내밀한 부분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살짝 들떠있었어요.


그러나 차마 티는 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복잡한 상황 한 가운데에 서있는 어지러운 청년들이었으니까요.

사실 기민한 당신이라면 알아챘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신의 기민함은 당신이 다정할 수 있는 이유였겠지요.


사랑이 뭘까 삶이 뭘까 죽음은 뭐고 우리의 태초부터 주어진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취기에 평소라면 하지않을 말까지 몽땅 다하고도 집오는 길에 근심 걱정 없던 사람은 사실 당신이 처음이었어요. 지나고 나서는 이 사실을 이후에 당신에게 전하지 못했다는게 몹시 후회가 됩니다. 당신은 항상 나에게의 당신이 무엇인지 반추하느라 지쳐버렸으니까요. 이걸 당신이 알았다면 당신이 조금 덜 지쳤으려나요? 그건 확신할 수 없겠습니다만. 아무튼 제가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한 건 사실입니다.


저는 그 날 한강에서 본 민물게마냥 남의 눈치를 보는게 몸에 베어버린 사람이에요, 솔직하지 못합니다.


내가 왜 좋냐고 묻는 당신의 물음에 외국어를 잘해서- 같은 말도 안되는 뚱딴지 답변을 해버린 것 또한 솔직하지못한 나름의 수줍음 이었네요.

하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 철교 위에서 나누었던 포옹은 제가 인간과 한 포옹 중에 가장 인류애적이고 가슴 벅찬 일이었다는 겁니다.

나 같이 번잡한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이 또 있다니, 여태까지 어디있었니?

애달파서 정말이지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

당신과 나는 왜 이다지도 생각이 많은 사람인걸까요!


그냥 모든 일을 천장에 붙은 야광별 스티커를 보듯 관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우리의 시작과 진행 과정은 순탄했을겁니다. 사실 지나고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 - 삶을 거시적으로 봤을때 - 저는 그때 단순하게 당신의 내부의 내부가 되고싶다는 사실을 순순히 털어 놨어야했어요. 이것 또한 매우 후회합니다. 물론 지나간 일이니 이것또한 거시적으로보면 그냥 하나의 헤프닝이겠지요?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당신은 나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 사람이에요.

예컨대 압구정 가로수길에서 조금만 걸으면 석양이 멋있는 한강 공원이 나온다는 사실과 잠실의 먹자골목에서 조금만 걸으면 잠실 철교를 지나 한강이 나온다는 사실. 서울 지리를 잘 몰라 어딜가도 번잡한 거리를 지루하게 걸어다니던 나에게 탈출구를 알려준 사람입니다. 나는 이제 무기력하게 사람많은 거리를 배회하지않아요.


저는 자주 당신과 한강에서의 추억을 생각합니다. 이후 한강은 제게 좀 다른 의미입니다. 당신 이전의 한강은 어쩌다 한번 놀러가서 붐비는 사람들 틈에서 좋아하지도 않는 치킨이나 뜯는 곳이었는데 말이에요.


이 회고의 시점은 뼈 시리게 추웠던 겨울부터 쪄 죽기 일보직전이던 여름까지. 가을이 옴과 동시에 당신도 여름과 함께 증발했습니다 . 생각해보니 여름에는 당신과 한강 간 일이 없네요. 우리는 그때 서로 괴로웠습니다 . 그래도 우리 같이 했던 여름, 해외에서의 이름 모를 바다는 마치 한강 같았어요. 살짝 지루해보이는 얼굴로 벤치 내 옆에 앉아있던 옆모습을 생각합니다. 그때 비행기 표를 바꾸어 당신과 함께 돌아갔으면 좋았을텐데.


당신은 더위에 약한데도 여름이 좋다는 내 말에 밖으로 다녀 주었어요. 사실 여름같은거 빌딩안에서 지내다보면 금방 지나갑니다. 당신이 나를 빌딩 안에서 꺼내어 여름보라고 이만치 헹가래 쳐준거나 마찬가지에요. 사실 이 여름에 그을리며 웃는 당신을 보면 가슴안에 무언가가 빠듯하게 들어찬 듯 좋았어요. (살면서 이렇게 솔직한 적은 처음입니다)

아, 정말이지 아쉬운 일밖에는 없네요.


당신이 뛰자고 할때 냉큼 바람을 가를걸,

아웅다웅할 시간에 그냥 눈 딱 감고 당신과 함께 이름모를 곳으로 훌쩍 떠나버릴걸


솔직하지 못했던 애정은 이제 갈 길을 잃어서 자꾸 나를 갉아먹어요. 마그마가 자꾸 새어나옵니다.


나는 시디를 들을 수 있는 카페에 당신이 날 찾으려 들어선 그 순간 아무 말 않고 당신에게 입 맞추어야했는지도 모릅니다. 전 사실 그때 쿵쾅거리는 맘을 숨기기 위해 애꿎은 노트북만 들여다 보고있었어요. 제가 바쁜 일이 뭐 많겠어요.


2.


저는 가끔 일이 안 풀릴때마다 당신과 심장과 심장을 가장 가깝게 맞닿게 껴안고 하루종일 잠만 자는 상상을 하며 버텼습니다. 창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렸으면 좋겠어요, 이불은 좀 까슬까슬한게 좋겠네요.

사실 아직도 이 생각으로 버티는지 모릅니다.

맨정신이었는지 정확히 잘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만 ( 아마 맨 정신의 당신은 이런 일을 하지 않을테니 맥주를 마셨겠군요 ) 우리 같이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지하철 플랫폼에서 가벼운 춤을 췄던일을 기억 하나요? 정말 우습게도 나는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서류 상으로 종속되는 일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눈 번쩍이며 누군가가 타인의 진실을 위해 싸워준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고 말하는 당신이라면 나도 감히 당신의 진실을 위해 싸워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도 당신에게는 비밀이었네요. 돌이켜보면 전 항상 해야할 말은 못하고 하지 말아야할 말만 지껄이는 인간입니다.


이제는 정말이지 고쳐야겠습니다.

그때의 나는 왜 그랬을까요?


내 슬픔은 밑바닥까지 꺼내서 보여줬으면서

당신이 있으면 불행해도 견딜만하다는 사실은 왜 안 말했을까요? 사실 이 말을 하려고 내 슬픔을 보여준거였는데 그만 말꼬리를 흐려버리고 말았어요 . 구제불능입니다.


당신은 늦은 밤 취해서 전화할때도 나보다 더 또렷하고 선명한 목소리로 말을 합니다. 나는 그 선명도와 채도가 낯설어 떨었는지도 몰라요, 두려워한게 아니라 마치 처음 보는 걸 넋 놓고 보는 기분이랄까요. 가끔 그때 내가 솔직했더라면 어떤 목소리를 들려줬을까 궁금해요 .



당신은 얼굴을 안보면 나아질거라고 말했지만 나는 모르겠어요, 비밀이 많던 나는 항상 당신이 없어도 당신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당신의 부재가 내가 하는 당신 생각의 빈도에 영향을 주진 못합니다. 아쉬운 생각의 비율이 높아지긴 하겠습니다만, 그것또한 당신 생각입니다.


이 여름이 끝났어요.

당신과 크리스마스 일루미네이션도 볼 수 있었을텐데 , 퍼석퍼석한 겨울에 코지한 카페에 앉아 니트 차림의 당신을 맘껏 구경했을텐데. 그럼 난 당신에게 놀림받기 위해 기꺼이 우스운 스웨터를 매일 입을 거에요.


미리 메리크리스마스

항상 어디서든 행복하길 바랍니다

이건 정말 제 가장 내밀한 당신을 향한 인류애입니다


요즈음의 저는 나의 사정거리에서 뚜벅뚜벅 달아나는 당신의 모습을 눈에 담아두고있어요.

걱정말아요 탄환은 이제 없어요.

방아쇠를 당기려는 내 손가락에 힘이 빠집니다.

바닥에 흥건한 피는 이제 누구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내 생각나면 편지 주세요.

그럼 나는 신념을 버리고 당신에게 너무나도 기꺼이 답장을 쓸렵니다.


이 번잡한 지구표면에 당신이 두 발을 딛었다 띄웠다하며 즐겁게 살아갈 수 있기를

나도 그렇게 살 작정이에요.



Ps. 사실 저는 당신이 나를 생각했다면서 썼다던 글을 6달 내내 궁금해왔어요. 평생 알 수 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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