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형편도 형편이었지만, 2001년 대입 수능은 역대급 물수능이었다. 만점자가 66명이나 나와 역대 최다 기록을 세운 해였다. 대학 입학 원서를 사러 서점에 갔는데,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여기저기 전화기를 붙들고 통화하는 사람들, 시간이 촉박해 뛰어다니는 사람들.
다들 눈치 작전을 쓰며 하향 지원을 한다고 했다. 서울 변두리 전문대조차 경쟁률이 100대 1을 넘었다. 전략도 정보도, 딱히 꿈도 없던 나는 갈피를 잃었다. 누군가 경쟁률이 낮다고 하면 지원해 보고, 날짜가 겹치지 않으면 또 지원해 보는 식이었다. 그마저도 원서비가 부족해 몇 군데 넣지 못했던 것 같다.
공부를 정말 잘하던 친구들은 좋은 대학에 갔다.
어중간한 성적이던 친구들은 전문대나 경기권 대학에 들어갔다.
그런데 나는 모두 떨어졌다.
그러다 첫 아르바이트로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게 되었다.
학교 다닐 때처럼 유니폼을 입고 일했다. 후에 서점에서도 유니폼을 입었으니, 어쩌면 그때가 ‘유니폼 생활’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성적인 성격이라 손님이 적은 평일 오전 근무를 지원했다. 오전에는 주로 청소를 하고, 주방과 카운터 일도 배웠다. 매장을 정리하고 주문을 처리하다 보면 네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중간 휴게 시간에는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게 그렇게 좋았다. 매니저 언니 오빠들이 메뉴판에 없는 ‘스페셜’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곳에서 8개월을 일하는 동안 나는 8킬로그램이 쪘다. 그만두고 나서야 매니저 언니가 햄버거 대신 김밥을 사다 먹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아르바이트로 16화음 폴더 휴대전화를 사고 학원비도 모았다. 가을에는 재수학원에 등록했다. 노량진 단과반이었는데 사람이 정말 많았다. 유명한 강사의 수업은 200명, 300명 제한이라 새벽부터 줄을 서야 했다. “카카나마 알아 철리~”로 시작하는 노래로 주기율표를 가르쳐주던 과학 선생님이 있었는데, 성함은 기억나지 않는다. 주기율표만 기억난다.
동네 300원짜리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부족한 과목은 단과반으로 채웠다. 내가 벌어서 학원비를 내고 공부했으니, 서울대는 아니더라도 인서울 정도면 해피엔딩이었을 텐데.
그런데 그해 수능은 또 지나치게 어려워졌고, 나는 결국 삼수를 하게 되었다.
애초에 기술이라도 배웠으면 어땠을까.
뭘 해야 할지 몰라 공부만 붙들고 있었던
스무 살, 스물한 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