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생 그녀의 이야기

by 희망메이커 지니

나의 이야기에 앞서 먼저 나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겠다. 그녀 없이는 내가 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녀의 명랑한 성격과 결단력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기 때문이다.


지나고 보면 명랑할 이유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지지리 궁상이었던 나날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런 어려움을 잘 모르고 자랐다. 중학생이 되어서야 아 내가 가난하구나, 좀 어렵구나 느낄 수 있었던.


당시엔 흔치 않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1958년생 임재순 씨.

남진을 좋아했고, 극장에 들어가기 위해 가발을 썼다던 꿈 많은 소녀.


그런 그녀가 방직공장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거기에서 우리 고모를 만났고, 지금의 내 아빠를 만나 결혼했다는 이야기. 결혼식은 1981년 12월인데, 나는 1982년 5월에 태어났다. 그렇다. 나는 속도위반으로 태어난 것이다. 아빠는 내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어디 자식을 앞에 두고서 그런 말을 하는지. 아이 둘 낳고 살고 있는 지금 그 이야기를 들었다면, 아마 아버지를 두 번 다시는 보지 않고 살았을 거다.


그렇게 아무 말이나 내뱉고 사는 내 아버지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처자식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말, 시집을 잘 가야 한다는 말은 우리 엄마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철없는 아버지가 병까지 나자 갓난쟁이인 나를 시골 할머니 집에 맡기고 돈을 벌러 나가야 했다. 서울에 있는 식당에서 일을 시작했고, 나는 서너 살까지 시골에서 할머니와 살았다. 그래서인지 할머니와 정이 많이 들었는데, 그건 나쁘지 않았다.


고생하는 엄마를 위해 외가에서 가게도 두어 번 차려주었다고 했다. 건강을 회복한 아버지가 일한답시고 나섰으나 번번이 말아먹어서 외가와도 연락이 끊긴 채 살았다. 바람기 또한 대단했는지 다섯 살 배기였던 내가 엄마한테 가서 아빠가 다방 아줌마랑 있다고 여러 번 일러바쳤다고 하는데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 바람기, 방랑벽 덕분에 엄마는 여동생과 나를 서울로 데리고 와서도 식당일을 계속 나가야 했고, 이번에는 집주인 할머니 손에 맡겨졌다. 그 집에 사는 손녀였던 거 같은데, 그 언니가 와서 마일로도 타주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새벽에서야 집에 와 자는 엄마랑 놀고 싶었던 우리는 엄마를 깨우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정말이지 고단하고 고단했을 그녀의 나이는 스물아홉.


매일 일하러 나가고, 내 기억에 거의 쉬지 않은 것 같은 그녀의 이십 대, 삼십 대.. 아빠는 공사판에 나갔다가 가끔 집에 와서 라면을 끓여주거나 된장찌개를 끓여 주었던 기억이 있다. 엄마 욕을 해가면서, 요리는 할 줄 아는 게 없다며. 그러고는 또 몇 달.. 같이 막일하는 후배랑 와서는 술 먹고 행패 부리고, 엄마가 숨겨놓은 비상금을 찾아 집을 나가버리는 일을 반복했다. 아빠가 나갈 때는 집이 도둑이 든 것처럼 엉망이 되었었는데, 나중에 들어 보니 노름 때문이었다고 한다.


내 나이 열세 살, 그녀의 나이 서른일곱에 이혼을 선택했다. 당시 사춘기였던 나는 혼자 지낼 아버지도 불쌍해 보였고, 상처도 조금 받았으나 후에 성인이 되어 생각하니 엄마가 참 잘했다 싶었다. 아버지와 계속 살았다면 아마 내가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갔으리라.


엄마 덕분에 나는 살았고, 살고 있고,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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