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인생엔 세 명의 남자가 있다. 앞서 말한 첫 번째 남편, 그리고 어린 딸 둘을 함께 책임져 줄 것 같았던 두 번째 남자 김금석 씨. 그리고 지금 함께 노년을 맞이하고 있는 홍춘삼 씨.
엄마의 두 번째 남자 김금석 씨는 2년 정도 그녀에게 짧게 왔다 갔다. 나에게 인생 첫 책상과 침대, 옷장, 식탁, 그리고 집 안에 있는 화장실 갖게 해 주신 분. 자기만의 가게도 있고 성실하신 분이었는데, 그건 나중에 다 내 빚이 되어 돌아왔다는 슬픈 이야기.
엄마의 두 번째 남편은 암에 걸렸다. 집 보증금이며 가게도 팔아서 병원비를 내다 못해 엄마와 내 이름으로 대출까지 받았다. 내가 어떻게 연대보증인이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성인이 되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 빚을 갚았다. 뭐, 조금 짜증은 났지만 2년 정도 좋은 집에서 잘 지내게 해 준 대가로 생각했다. 엄마는 그것 말고도 빚이 더 있었는데, 딱히 나더러 갚아달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매일같이 집에 독촉장이 오니까 나도 벌어서 좀 갚았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그걸 다 갚고 나서는 재수를 하겠다고 나섰다. 어릴 때부터 공부는 곧잘 했기 때문에 엄마도 나더러 얼른 돈 벌어 집안에 보태라고 하지는 않으셨다. 대신 쉬는 날 없이 자기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셨다. 그게 지금도 참 미안하다.
내 나이 스무 살일 때, 그녀의 나이가 마흔넷. 꽃다운 나이에 나를 낳아 이십 년을 키워 조금 숨을 돌리려는데, 빚을 좀 갚아주더니 대학을 간단다. 둘째는 고등학교를 자퇴해서 검정고시를 본다 하고, 월세는 내야 하고, 몸은 여기저기 아파 오는데 의지할 데가 없었을 거다. 그때 세 번째 남자 홍춘삼 씨를 만난다.
홍춘삼 씨는 엄마랑 같은 식당 주방에서 일하던 분인데, 엄마를 많이 좋아했던 거 같다. 엄마 때문에 카드빚 돌려 막기 하다가 신용불량자가 되었다고 했다. 당시 카드이자는 어마무시했는데, 원금만큼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걸 아직도 갚고 있으니 말 다했다. 무지 심성이 착하신 분이나 본인 것을 챙길 줄 몰라 재산도 형한테 다 빼앗기고, 오갈 데가 없어져 우리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나는 그때쯤 대학을 휴학하고 서점에 일을 하러 나갔는데, 진짜 그때 번 돈은 다 어디다 썼는지 모르겠다. 크게 사치한 것도 없이, 엄마에게 넉넉한 생활비를 준 것도 없이 월급은 늘 통장을 스쳐갔다. 엄마는 별다른 잔소리 하나 없이 나를 내버려 두셨는데, 그게 또 지금 생각하니 참 미안하다.
아무튼 나는 딱히 엄마 인생 때문에 라기보다도 결혼은 못할 거 같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어찌어찌하여 결혼도 하고 아이도 둘이나 낳아 살고 있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여동생도 마흔에 둘째까지 낳아 잘 살고 있다. 딸 둘을 다 출가시킨 그녀의 나이는 이제 예순여덟. 황혼이 지나도 한참 지났다.
간혹 엄마에게 필요한 걸 물어보면, 물티슈나 생필품을 택배로 보내달라고 하거나 요즘 취미로 하고 계신 색칠하는 책을 사달라고 하신다. 그러곤 꼭 얼마라도 부쳐주신다. 2만 원, 5만 원.. 그 정도 안 받아도 되지만 나도 내 코자 석자라 감사하게 받는다. 육아휴직을 한 뒤로는 생활비를 못 드리고 있다. 다행히 홍춘삼 씨가 열심히 본인 빚도 갚고, 엄마랑 생활하고 계셔서 부담을 덜었다. 딱히 아버지라고 입에 붙지는 않는데, 아저씨가 없었다면 그 부담이 전부 내 몫이었기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엄마는 퇴행성 관절염이 심해져 본인이 자가용이라고 부르는 이동 보조기 없이는 다닐 수가 없다.
앞으로 어떤 날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녀의 청춘을 다 바친 아이 둘은 모두 출가시켰고, 노년을 함께할 남자도 있으나 몸이 아프다. 금쪽같은 손주들을 넷이나 보았다. 그녀의 첫째 딸인 김땡땡은 위로는 돌봐야 할 부모가 있고, 아래로는 키워야 할 자식이 있는 중년이 되었다. 1958년생인 그녀와 1982년 그녀의 딸, 띠동갑 개 띠인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이제 김땡땡의 이야기를 할 시간인 것 같다.
엄마가 나와 함께 한 인생도 두 장으로 압축이 되다니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