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생 김땡땡은 국민학교를 다녔다. 한 반에는 48명의 아이들이 빽빽하게 있었고, 그런 반은 13개나 되었다. 내 남편은 공교롭게도 나의 국민학교 3년 선배였는데,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눠서 국민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학교 앞은 문방구가 여럿 있었고, 학교 준비물을 사거나 컵떡볶이 같은 간식거리를 사다 보면 용돈은 금방 바닥이 나곤 했다.
학교는 추웠다. 각 교실마다 각자 난로를 때야 해서, 겨울이면 당번을 정해 석탄인지 나무인지를 가져다 불씨가 꺼지지 않게 해야 했다. 교실 바닥은 늘 반질반질하게끔 구두약을 발라 닦아야 했고, 장학사라도 온다고 하면 대청소를, 스승의 날에는 교탁에 아이들 부모가 준 선물이 가득 쌓이는 풍경. 이런 게 기억이 난다.
3학년 때인가 엄마가 담임선생님 차 트렁크에 사과박스를 넣어주었다. 요즘의 그런(현금이 가득 든) 박스가 아니고, 정말 사과 한 상자를 엄마가 담임선생님 차에 싣는 모습을 보았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엄마는 예쁘게 화장하고 학교를 와서 커튼을 바꿔주었다. 그게 엄마만의 촌지였던 거 같다. 실제로 돈을 주었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는데 커튼, 화분은 늘 해주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렇게 무난하게? 국민학교 시절을 보냈다.
방과 후에는 학원과 동네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냈고, 이따금씩 이 집 저 집 돌아가며 놀았다. 우리 집에 친구들이 온 적은 없는 거 같은데, 아마 단칸방이어서 그랬나 보다. 근데도 잘 어울려서 놀았다. 특히 엄마가 일하는 옆 가게 레코드 집 가게에 딸린 방에서 그 집에 사는 다섯 살 난 여자 아이와 장난감을 가지고 같이 놀아 주었고, 누구네 집에 가서는 후레쉬맨 비디오를 보았다. 여동생과 종이인형을 자주 사서 오려대고, 하나뿐인 마루인형에게 버리는 양말로 옷도 만들어주고, 공기놀이, 고무줄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여름방학에는 시골 할머니 댁에, 겨울 방학에는 홍제동 작은 아빠네 가서 지냈다. 홍제동 작은 아빠는 집에서 봉제 일을 했기 때문에 우리를 맡겨놓은 것 같다. 처음엔 아빠랑 갔었는데, 나중엔 동생이랑 둘이서 전철을 갈아타고 가곤 했다. 할머니 댁과는 달리 그렇게 오래 지내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그 동네엔 고모네도 있고 사촌동생들도 많아서 함께 모여 놀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작은 엄마들은 무슨 죄인가 싶다. 조카들 까지 돌밥돌밥을 해 먹여야 하는 방학이라니.
엄마는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일을 하는 건지 집에서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식당에서 살다시피 일을 했다. 우리는 아침밥도 저녁밥도 그 식당에서 먹었고, 엄마는 우리가 잠든 후에 들어왔다가 우리를 깨우고 일하러 나갔다. 아침에 머리를 묶는 것도 그 식당에서였다. 그 집 사장님과는 언니동생하며 지내셨는데, 후에 그 형님이 아흔이 되고, 치매에 걸릴 때까지 엄마는 왕래했다.
아빠를 본 기억도 드문드문 있다. 아빠는 공사판 다닌다, 사업을 한다며 집에 들어오는 날이 거의 없었다. 정말 그렇게 일을 했으면 집이라도 하나 장만할 법한데, 우리는 엄마가 일하는 식당 꼭대기 옥탑방에서 국민학교 내내 살았다.
막일하던 아빠는 한 번씩 집에 올 때마다 엄마가 숨겨놓은 돈을 다 찾아서 나가버리고.
뭔가 궁색하다는 생각은 고학년이 되어서야 하게 되었다. 여름옷은 가끔 사 주셨고, 겨울옷은 주로 물려 입었어서 한 번은 오리털잠바를 사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처음으로 내가 골라서 산 주황색 파카. 오리털이 결코 숨이 숨지 않아 정말 빵빵했는데, 그렇게 따뜻한 잠바는 생전 처음이었다. 새 거는 좋은 거구나 생각했다.
걸스카우트나 아람단이 멋져 보였는데, 엄마에게 하고 싶다고 말해 본 적은 없다. 단복도 사야 하고, 이거 저거 돈이 많이 들어간다고 들으니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대신 나는 어딜 가나 책 읽기를 좋아했다. 엄마는 집에 전집을 들여놓으셨는데, 그걸 한 번씩 바꿔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도 돈이 상당했던 거 같은데, 그래서 돈을 못 모았나 싶기도 하다. 무튼 그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친구네 놀러 가서 그 집 책을 다 보고, 친척 집에 가서는 그 집 책을 다 보고 오는 식이었다.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새로운 취미를 찾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