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티의 추억
칭다오에서의 그 짧은 기간 동안
괴로움과 심신의 지침은 차곡차곡
복리로 정직하게 늘어나면서
안 그래도 심하게 유리멘탈이었던
나의 그것은 1에서 서서히 100까지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버티고
살게 해 준 첫 보약은
초등부 부장님과 처음 만난 날
내게 정말 맛있다고
먹어봤냐며 자비로 사주셨던
중국의 차갑고 기분 나쁘고 외로웠던 공기에
적응할 엄두조차 안 나고,
허황되고 두려운 기분으로 처음 만났던
부장님은
27살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던
첫사랑의 이미지와 너무나 많이 닮았었다.
정말 친절하셨고 타국이라 향수병도 올 수 있고
힘들겠지만
그래도 잘 견디다 보면 즐겁고 행복한 것도 많으니
건강관리 우선 잘하고 적응해서 돈도 많이 벌라고
용기를 주셨던
진짜 눈물 나게 감사했던 인성갑이셨던
분이었다.
" 김 선생님~ 다정하고
정말 성실하고
좋은 분이라 들었다 "라고
( 누가 말한 걸까 아직도 의문 설마 총원장이;;;;반전이라기보단
의도가 있는 침 잔뜩 바른 가식 90 진심 10프로 섞은 칭찬이라 생각한다.)
여기 초등 아이들 참 귀엽고 착하고
선생님 잘 따를 거라면서
걱정하지 말라며
수업하기 전에 미리 브리핑 듣느라 만났을 때 사주셨던
그 밀크티는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보약이었다.
지금은 매우 보편화되고 인기 있는 음료이지만
그 당시에 난 태어나서 처음 맛본 완전 신세계 음료였다.
이때 처음 밀크티를 알게 된 나는 그 까맣고 쫀득한 타피오카펄과
밀크티의 쌉쌀 고소함에
깊은 사랑에 빠져
지금도 공 0, 아마스 0, 차 0의 단골고객이다.
부장님과 둘이 앞으로 내가 근무할
초등부 분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밀크티를 사러 갔던 그 길은
중국에서 발을 디딘 곳 중 가장 부드럽고 편안한 길이었다.
부장님은 정말 좋은 분이셨지만
말을 상당히 아끼셨다.
지금 내가 학원에 대해 들어야 할 학원의 핵심인
궁금한 이야기들은 아주 약간이었고,
내 귀에 들어오지도 않던 소소한 중국의 궁금하지도 않았던
이야기들을 주로 말씀해 주셨다.
직업상 해외를 다녔어도 한정되어 있던 공간에서 움직였기에
듣고 보니 신기하기도 했지만 한 귀로 듣고 두 귀로 모든 것을 흘릴 정도로
경청이 특기였던 난 부장님의 친절한 중국 설명에 집중을 전혀 못했다.
있는 내내
칭다오에서 함께 일했던 모든 선생님들은
말을 심하게 아끼신단 걸 느꼈다.
나랑 방을 같이 사용하던 룸메
선생님만 제외한 모두가
칭다오의 깨진 환상은 사실 시장에 내놓기 덜 민망한 B급 제목이다.
칭다오의 살아있는 지상 지옥
칭다오의 어두운 에덴동산
칭다오에 방문한 단테의 신곡
등이 실은 내 마음속 제목이다.
세상엔 남자가 반 여자가 반은 딱 정확히 아니지만,
칭다오에서 나의 삶은 낮에는 남자반 ( 남자 50프로 남자들 반모임 중복의미)
밤에는 여자반( 여자 50프로 여자들 반모임 중복의미) 이었다.
퇴근 후 밤시간 숙소에서는 세명의 여자들이 복작거리며
아니 아주 조용히 지냈던 여초
많은 시간 선생님과 나 둘이 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부원장님의 행보는 관심도 없었지만 차라리 없는 게 더 편했다 ^^
출근 후 낮에는 씩씩하고 활기찬 분위기의 남초였다.
이런 좋은 분위기를 한 번씩 총원장이라는 인간님? 이
방문해서 찬물을 한 100 바가지 확 끼얹고 갔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일은 기억이 안나는 총원장의
꾸준한 악마포스에 경의를 표합니다.
입시를 위주로 하는 학원이었지만.
어린 초등학생부터 대학 입시를 코앞에 둔 수염 난 아저씨 같은
고등학생까지 학생들은 매우 다양했다.
나는 성격 자체가 어린아이들과 잘 맞는다.
그래서 주로 티칭 했던 오랜 기간 동안 대부분은 초등학생들과 함께했다.
지금도 누군가를 만나서 얘기하다가도 다 큰 성인인데;;;
나보다 동생이면 " 우리 oo 오늘 힘들었지 " 이런 말투가 그냥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올 정도이다.
칭다오에서 함께했던 주재원분들의 자녀들인 귀여운 꼬맹이 초딩들은
아직도 얼굴에 선하고 보고 싶은 보석들이다.
아 지금은 다 청년이나
심지어 아줌마 아저씨가 돼있을 수도;;
칭다오의 부담스럽게 조용하고 큰 교무실과 교실들은
본점이었고
칭다오 한복판 서울 같은 분위기에 있던 도시의 본점에서
봉고버스( 나의 어린 시절 작은 버스를 지칭하던)
를 타고 한참을 가야 있던
초등학생들만 따로 가르치던 시골분위기의 분점으로
부장님 , 나 , 나보다 어렸던 남자선생님 이렇게 셋이서
매일 거의 2시간을 왕복으로 이동했다.
매일 본점에 모여 그날의 수업에 대한 브리핑을 본점의 총 부장님께
드린 후,
간단한 회의를 한 후
분점으로 출근했다.
분점으로 향하며
그 작은 봉고 버스 안에서 내다보던 바깥 풍경은
경악 그 자체였다.
지금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길거리에 널려져 선택을 기다리는
벌거벗은
닭고기들 ㅠ
파리떼가 단체로 그들의 곁을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고,
그걸 볼 때마다 처음 날 죽다 살아나게 만든
장염이 다시 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본점에서 분점으로 가는 길은 차로 약 50분~1시간 정도로 꽤 오래 걸렸고
도시에서 점차 벗어나면
한국의 딱 50-60년대 분위기를 풍기는
전형적인 한국의 가난했던 시대
시골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 너무나 놀랐다.
작은 봉고버스를 타고 가는 과정은 세월을 거꾸로
거스르는 여정이었다.
그렇게 초등 부장님께서 운전을 하시고
나와
남자 선생님 한 분
이렇게 우리 셋은 매일
긴 시간 여정을 하는 기분으로
출퇴근을 했다.
그 안에선 단 서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는다.
공식적인 회의가 아닌 이상 우리는 대화하지 않았다.
심지어 바깥의 저 말도 안 되는 위생이란 개념을 벗어난
닭을 파는 모습을 모두가 보고도 말이다.
이게 생각보다 사람의 정신을 이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조용한 걸 좋아하는 나에게도
수업이 끝나고 10시가 넘는 그 늦은 시간에도
다시 분점에서의 수업을 정리하고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문단속도 철저히! 한 후
우리는 그날의 보고를 위해 매일 본점으로 다시 회귀했다.
그렇게 모든 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면
난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 옷을 갈아입을 힘조차 없었다.
숙소로 돌아오면 부원장님이 계셔야 하는데
내 기억에 부원장님은 항상 계시는 건 아니었다.
그런 날은 어디에 계셨던 건지
아직도 정확히는 다 알 수 없지만
추측은 가능했다.
나의 또 하나의 강력한 피로회복제였던
나랑 한 방을 쓰던 룸메선생님은
그렇게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온
나의 피곤하고 지칠 대로 지친 일상에
긍정 에너지를 가득 채워주신 너무나 고마운
강력한 비타민 같은 존재였다.
중등을 가르쳐서 본점에서 일했던 선생님은
긴 시간 이동을 하며 지쳐하는 몸 약했던
나를 많이 걱정해 주고 정말 많이 위로해 주었다.
그게 타지고 그게 향수병인가
선생님이 말 한마디만 들어도 눈물이 뚝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