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No. 마당내음

by 김주리

77년생인 나

지금도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은

초. 중. 고 부모님과 동생과 함께 하던 그 어린 시절~

난 사람과만 함께 한 게 아니었다

절대로

귀신은 아님... 오해주의!


그 당시엔 아파트가 많이 없었지만 ,

유난히

마당이 넓은 단독주택이었던 우리 집엔

함께 하던 다양한 동. 식물의 생명체들이 있었다.


마당과 거실을 오가며 엄마를 힘들게 한;;;;

믹스견인 '엄마와 아들' 강아지 2마리'

그중 아들인 순돌이는 ;;천둥번개만 치면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졌길래

마당에서 그 비를 다 맞고 현관에서 직진으로 쳐다보면 존재하는

남동생 방으로 초고속으로 달렸다.

책상밑으로 들어가 오랫동안 안 나와;;; 엄마를 화나게 만들고 거실부터 방까지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우리의 멘탈을 다 나가게 만들었었다.


가필드랑 똑같이 생긴 회색의 페르시안냥이 '복실이'

( 그 당시엔 마당에 그리 높지 않은 담이라는 게 있었는데

어느 날 낮에 담 넘어 들어와 가족이 됨;;;

차마 나가라고 하지 못했던 착했던 우리 가족 ㅋ;;;

나가라도 해도 말귀도 못 알아들었겠지만ㅠ ㅋㅋㅋ 흑)


심지어 마당엔 낮 2시에 자꾸 울어서 시끄럽단 이웃집 신고로.ㅠ.ㅠ

유명을 달리했던 닭;;;( 다시 한번 명복을 빌고 미안하다.ㅠ)


그리고 노란 조를 좋아하던 새장의 새

그래서 난 지금도 잡곡 코너에서 조를 보면

자꾸 새가 먹는 걸 왜 이런 느낌이 든다 ;;;;


그리고 가장 일 많이 시킨

구피 아닌 커다란 금붕어 몇 가족들;;;;이 난리피고 매일 수영하던

여리하고 왜소하신 엄마의 덩치 몇 배는 될 듯한

커다란 대형 어항까지


그야말로 지금 생각해 보면 "동물농장"이 따로 없었다.


엄마는 체력도 약하고 힘도 약하셨는데..

공부한답시고 엄마도 많이 안 도와드리고 독서실만 가던 나와 동생

사업으로 바쁘셨던 아빠를 대신해

그 많은 다양한 동. 식물들을 엄마가 거의 다 혼자 케어하셨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얼마나 엄마께 미안한지 죄송한지


그런데,

50살이 된 지금 내 어린 시절은 너무나 좋은 추억으로

가슴과 머리에 핑크빛과 그린빛으로 저장되어 있다.

힘들 때 떠올리면 안정을 주는 그린과

악해지려 할 때 따스한 사랑을 주는 핑크빛으로 말이다.


나의 학창 시절은

벤 땡돌이 순돌이 복실이 온갖 동물들과 교감을 하며 지냈다.

하교 후 대문을 열면 마당 끝에서 뛰쳐나오며

엄청나게 날 반겨주던 강아지 고양이

소리로 반겨주던 새

심지어 시도 때도 없이 울음으로 반겨주던 닭;;;;

과 지내던 기억은 지금도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하다.


나의 자녀들이 "엄마 예전에도 학원이 있었어요"?

( 학원 안 다니고 싶다는 말이겠죠...)

라는 말을 물어볼 때 엄마는 학원 가기보다 마당에서 밴하고 순돌이랑 놀았어

복실이랑 놀았어란 말을 하기가 너무나 미안하다.

엄마는 길에서 친구들하고 매일 놀았어.라는 말을 하기도 미안하다.


이제 난 그때의 엄마 보다 더 나이가 들었다.

그런데 요즘은 더욱더 그 시절이 그립고 떠오른다 왜일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느꼈던 행복 누렸던 도시 속 자연의 내음

그런 것들을 나의 아이들에게 물려주지 못해서일까


난 내 몸 편하자고 아파트랑 비슷한 오피스텔에 산다.

단독주택으로 이사 가고 싶은 마음만 있을 뿐 실천은 쉽지가 않다.

나의 엄마는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더 많은 일들을 해내셨는데,

그런 엄마를 떠올리니 난 너무 약하고 부족한 엄마인 것만 같다.

아이들에겐 항상 미안하기만 하다.

요즘 길가에 엄청난 은행잎들이 떨어져 있고 환경 미화원 분들이

바닥에 들러붙어 잘 떨어지지도 않는 그 수많은 잎들을 힘들게 치우시는 걸 본다.


은행나무가 있었다.

우리 집 마당엔 아주 큰 은행나무가...

사과나무 감나무 목련꽃이 피는 나무도 있었다.

가을이면 마당과 집 바로 앞 골목에 떨어지는 그 은행낙엽 청소는

정말로 어마어마하게 힘든 노동이었다.


난 길에서 은행잎을 치우시는 미화원님들 볼 때마다

엄마가 아빠가 힘들게 낙엽을 치우시던 그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건 행복하기보단 너무나 미안하고,

엄마 아빠가 나와 남동생에게 물려준 행복을 위한 대가 같아

죄송하고 고맙기만 하다.


마당 한 컨에 커다란 가마솥이 있었다.

도시에서도 난 가마솥밥의 맛이 무엇인지

그 맛을 경험한 운 좋고 행복한 어린이였다.

농구대를 대문앞쪽에 붙여주셔서, 마당에서 농구연습을 하고

베란다에는 탁구대를 놓아 시간 될 때마다 가족들이 모여 탁구를 치고

작은 연못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보며 새소리를 들으며

강아지와 뛰어놀며 웃고 떠들던 난 너무나 행복한 어린이였다.

줄넘기 안걸리고 3000개까지 늘게 연습했을 정도로

마당이라는 곳이 집에 있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었다.


난 부모다.

엄마다.

그러나

그 당시 마당내음을 내 맘에 심어준 엄마 아빠의 희생과 배려를

아직 우리 부모님을 닮기에는 너무나 멀었나 보다.


이젠 입시생으로 접어드는 큰 딸을 보며

공부에 대한 생각과 걱정

공부에 대한 배려가

먼저 들 수밖에 없는 그런 2025년의 엄마이다.



사춘기인 딸과 아직은 아기 같은 막내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1990년의 엄마가 되어 다녀왔으면 좋겠다.

그때 내가 뛰어놀았던 마당으로

모두가 잠시만 다녀오고 싶다.

우리 집에 온 지 1년이 넘은 반려견 둥이와 함께~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 그 풀내음을 함께 맡아보고 싶다.

엄마로서...의 바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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