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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Ssam Jan 14. 2020

은밀해진 조리돌림에서 생존하기

사회적 죽음을 강요당하다.

조리돌림?


 “조리돌림”은 일종의 사회적 형벌이다. 범죄나 부도덕한 행실에 대해 공개적으로 모욕과 수치를 주면서 처벌하는 거다. 과거에는 간통, 매춘과 같은 범죄를 저지르면 죄명을 명패에 적어 목에 걸고 줄에 묶인 채 북을 치면서 동네를 돌아다니게 했다. 중한 범죄의 경우에는 감옥이나 귀향과 같은 엄한 형벌을 내리겠지만 이런 형벌이 여의치 않았을 때 사회적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으로 대신하는 셈이다. 지금의 조리돌림이라면 아동, 청소년 대상 성범죄자에게 형사 처분 이후 개인 신상을 일반에 공개하는 것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형벌로서의 조리돌림은 공적인 기관을 통해 사회적 동의로 행해진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구체적 죄목에 대해 공개된 공간에서 이뤄진다.     


은밀해진 조리돌림


 이러한 조리돌림은 공적인 처벌이다. 그렇기에 조리돌림을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얼굴을 드러내고 한다. 공적인 행위이기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해 조리돌림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도 공적으로 책임진다. 그런데 최근에는 사적인 영역에서 은밀한 조리돌림이 흔해졌다. 공적인 공간이었던 광장이 인터넷이나 SNS 공간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매체는 반응이 매우 빠르고(즉각성), 영향력이 크고(확장성), 누가 주도하는지 알기가 어려운(익명성)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매체의 특징이 조리돌림을 은밀하게 만든다. 인터넷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조리돌림의 대표가 악플(악성댓글)이다. 인터넷 공간의 즉각성, 확장성, 익명성은 악플의 표적이 되는 순간 가면은 쓴 실체 없는 군중에게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하는 조리돌림을 만들어낸다. 빈약한 근거를 가진 악플이 장난처럼 반복되어 간다. 이러한 악플은 사회적 죽음을 강요한다. 악플의 대상이 되면 마녀사냥의 대상에게 화형이 강요되듯 사회적인 매장이 강요된다. 악플이 아이돌이나 연예인, 정치인처럼 유명인에게서 일어나지만, 일반인으로서도 유사한 조리돌림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이 있다. 바로 SNS 환경이다. 관련된 시연을 하나 들어보자.      


스토리>

40대 전문직 여성인 A는 최근 단톡방에서 일어난 황당한 일로 지금도 생각하면 분노에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6개월 전 A는 고등학교 동창 단톡방에 초대되었다. 몇 명 친구들이 모여 단톡방을 만들고 아름아름 연결된 동창들을 초대하고 또 초대하면 누군가 자신을 초대한 모양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0년 무렵이 지났고 그간 연락도 거의 안 하며 지내던 친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단톡방 안에서 반갑게 인사하고 친구들 소식도 듣고 자기 소식도 전했다. 고등학교 때는 내성적이고 친구도 별로 없었지만, 지금은 대인 관계도 자신 있게 하는 편이라 단톡방에서 일상적인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다. 그런데 얼마 전 가끔 개인적인 연락을 나누던 동창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A가 포함된 동창 단톡방 이외에나 친한 동창끼리만 모여있는 별도의 단톡방이 있는데 그 안에서 내가 단톡방에서 활발히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험담을 한다는 거였다. 내용은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존재감도 없던 A가 전문직이 되고 나니 단톡방에서 잘난 체를 한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전달해 준 친구는 단톡방 안에 몇 명이 괜히 질투하는 것 같으니 당분간 단톡방에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A는 순간 자신이 단톡방에 글을 올릴 때 친근하게 반응하던 친구들마저 뒤로는 자신을 무시하고 있었다는 상상이 들면서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A는 바로 SNS를 탈퇴하고 자신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전달해 준 친구를 포함하여 동창 친구들과 연락을 끊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은밀함의 폐해


 불특정 다수가 익명을 바탕으로 누군가를 조리돌리면 누가 왜 조리돌림을 하고 있는지 그 근거가 점점 떨어진다. 공적인 기관도 아니기에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부족한 근거 위에 누군가는 계속 사회적으로 피해를 본다. 실체 없는 모호함은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실체 없는 공격이고 실체 없는 비난이기에 당하는 처지에서는 더 무섭고 불안해진다. A의 사연에는 이러한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A의 입장에서는 황당하고 억울하고 무섭고 불안하다. 자신의 평소 행동을 누군가가 은밀하게 웃음거리와 조롱거리로 만들었다는 것에 화가 난다. 당장에라도 뒷말을 하는 동창을 찾아내 한 소리 내질러 주고 싶지만, 그런 동창들을 확인해 낼 방법이 없으니 오히려 야단법석을 치는 자신이 더 초라해 보일 것 같다. 오히려 자신이 조리돌리는 상황을 합리화시킬 것 같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집단 내에서 피해당한 채 묵묵히 있으려 하니 사회적 매장을 강요당하는 셈이다. 그리고 막상 자신을 비난하는 상황을 보고만 있으면서 자신에게 전달해 주고 사회적으로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친구에게도 화가 날 수 있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누가 참여한 건지 의도가 어떤 것인지 파악하기도 힘들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군 적군을 구분할 수 없으니 그 집단 전체에 불신이 생긴다.     


걸리면 죽는다


 이러한 조리돌림은 가해자의 실체가 없다. 발단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일단 찍히면 그 순간부터 조롱거리가 된다. 일종의 집단적 유희의 소재가 되어버린다. 이후에는 왜 그런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도 모호해져 버린다. 한참 전의 사소한 실수가 계속 논쟁거리가 되어버리기도 하고 사소한 오해가 엄청난 잘못으로 부풀어져 소설화되기도 한다. 실체가 없다는 이야기는 당하는 처지에서도 누가 당할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즉 내가 이러한 조리돌림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이러한 조리돌림에 당하지 않는 것에 안도한다. 그러니 A에게 이야기를 전달해 준 친구 처지에서는 자신이 A의 상황이 아닌 것이 다행일지도 모르고, 어느 순간 A의 편인 것처럼 보일까 봐 불안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군중 속에서 조리돌림은 각자를 불안하게 만들고 서로를 불신하게 만든다.     


해결을 위한 대책은 없고 하지 말아야 할 금기만 있다.


 막상 A 입장에서는 고등학교 동창이 원래부터 가까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불쑥 초대를 받았고 어느 순간 조리돌림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원래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기에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연락을 끊고 차단하는 선택을 했다. 그 집단과는 사회적인 죽음을 선택한 셈이다. 이러한 선택을 하고 나면 다시금 상황을 수습할 기회는 상당히 줄어든다. 동시에 이차적인 피해도 줄어든다. 어차피 연락하던 사이도 아니니 없어도 된다고 하면 될 일이다. 그렇기에 다소 극단적이긴 하지만 그 선택이 이해가 되는 면도 있다. 최악의 상황을 자신이 끊어낸 셈이다. 그런데 만약 가까운 사이의 관계, 혹은 필요한 사이의 관계에서 유사한 일이 일어난다면 쉽게 끊어내기가 어렵다. 지켜야 하는 관계에서 조리돌림이 생겼을 때는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할지 언뜻 답을 나오지 않는다. 달리 말하자면 해결을 위한 대책이 쉽지 않다. 그 대신, 하지 말아야 할 금기는 있다. 일종의 피해를 받은 이후 추가적인 이차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전략이다. 최선이 없으니 일단 차선이라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생존 전략이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생존 전략


단번에 상황을 역전시킬 방법이 마땅하지 않을 때는 현재와 앞으로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 번재는 감정적인 대응을 자제해야 한다. 지금은 자신을 비난하는 상대편(적)을 늘리지 않아야 한다.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자기편이 줄어든다. 그러니 불특정 다수에게 화를 내거나 비판을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피해 상황을 이야기하고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또는 지지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지켜내야 한다. 두 번째는 실체 없는 가해자를 크게 보지 말아야 한다. 가해자가 모호하기에 피해자로서는 그 대상이 너무 크게 보이고 불안해진다. 그렇기에 집단 전체를 적으로 판단해 버리는 인지 왜곡이 발생할 수 있다. 익명의 조리돌림에서 가해자는 아주 일부인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집단 내 사람들은 방관자이거나 관심이 없다. 그러니 막연한 불안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 주변 사람들을 지켜내고 그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도 필요하다. 세 번째로 어른으로서의 입장을 지켜내려 노력해야 한다. 어릴 때는 다들 어린아이이기에 놀리는 친구도 당하는 친구도 다 미성숙하다. 그렇기에 상처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 집단적 조리돌림의 경우에도 가해자는 마치 아이처럼 미성숙하게 비난하는 경우가 많아서 거기에 휘말려 자신도 아이처럼 반응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상대방은 어린아이처럼 철없이 놀리더라도 그것을 성숙한 어른의 입장으로 받아내면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상대방 꼴이 오히려 우스워진다. 마지막 네 번째로 만약 아무리 노력해도 차선책이 나오지 않고 해결방법이 없을 때는 A처럼 과감히 끊고 피하는 것이 필요하다. 36계 줄행랑도 생존 전략이다.     


도처에 퍼져 있는 사회적 죽음


휴대전화, 인터넷, SNS 등 매체의 다양화는 개인의 사회적 폭을 무한히 확장하게 했다. 반면 그 확장된 사회에서 개개인은 더욱더 큰 고립감을 느낄 수 있다. 가까운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때로는 살을 부대끼고 현실적으로 경험하고 다양한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도 많다. 그렇지만 현재의 확장된 매체 환경은 오히려 더 모호하고 비현실적인 인간관계를 만들어낸다. 그 상황에서 대처를 잘 해내면 사회적으로 훨씬 큰 영향력을 경험하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오히려 더 큰 고립감을 느낀다.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적 연결이 더 복잡하게 많은 사회에서 우리는 사회적 죽음에 대한 위협을 더 크게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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