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광Ssam Apr 24. 2022

암은 트라우마, 일종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암이라는 트라우마는 불안으로 시작한다.

관련 이야기


A는 중학생 아이를 둔 40대 직장인 여성입니다. 원래 건강 체질이기도 하고 일도 하랴 자녀도 키우랴 하다 보면 자기 몸을 돌볼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아가다가 직장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갑상선암일 수 있느니 정밀검사를 받아보라고 합니다. 1달에 걸친 정밀검사에서 다행히 진행된 상태는 아니고 비교적 초기에 발견해서 치료를 하면 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그런데 뭔가 이제까지는 살면서 생각하지 않았던 죽음이라는 의미가 밀물처럼 밀려옵니다. 언젠가부터 한동안 멍하게 있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남들보다 열심히 했던 직장 일들과 항상 우선으로 생각했던 자녀의 일도 어느 순간 무슨 소용이 있나 느껴집니다. 마치 인생을 영화의 주인공처럼 살다가 어느 순간 영화관 속의 관객이 되어 남의 인생을 보는 느낌입니다. 암일 수 있다는 의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던 순간이 선생님의 목소리, 얼굴 표정, 입었던 옷, 진료실 안의 분위기, 밖에서 들려오던 사람들의 소음까지 하나하나가 뚜렷하게 떠오릅니다. 주변에서 그래도 다행이라고 갑상선암은 요즘은 암도 아니라는 이야기가 전혀 위로가 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아픈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아 짜증이 납니다. 이제까지 내가 뭘 하고 산건가 우울한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다시 기운을 차리려 애쓰고 괜찮다고 가면을 써 보지만 그러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슬픈 감정에 눈물이 납니다. 나 자신이 마치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느낌마저 드는데 주변에서도 나를 그렇게 느끼겠구나 생각도 들면서 내가 왜 이러지 걱정됩니다.  


암은 트라우마


트라우마는 외부의 사건으로 인해 우리 몸이나 마음이 입는 심한 상처를 뜻합니다. 외상이라고 번역을 하는데 트라우마 자체로 정신적인 영역의 외상을 통칭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트라우마와 관련된 대표적인 정신적인 질환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입니다. 미국정신의학회(APA)에서 언급하는 트라우마 사건은 죽음이나 부상에 대한 실제적인 상황이나 위협적인 상황에 대해서 직접적인 경험과 간접적인 경험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트라우마에 대해서 심한 두려움이나 공포, 무력감을 경험할 정도로 매우 위협적이고 충격적인 상황으로 한정하고 있었지만 최근의 정신의학에서는 주관적 느낌보다는 객관적인 경험으로 트라우마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암 경험은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암 환자는 암 진단이 고려되는 시점부터 죽음에 대한 실제적인 위협을 경험합니다. 아무리 내가 정신적으로 강하더라도, 예후가 아주 좋은 암이라 하더라도, 초기에 발견되어 어렵지 않게 치료할 수 있는 암이라도 모든 암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트라우마 경험은 환자 본인뿐 아니라 같이 생활하고 돌보는 가까운 가족에서도 함께 일어납니다. 트라우마는 외상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뿐 아니라 간접적인 경험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암 경험자라고 할 때 암 환자와 암 환자의 가까운 가족을 함께 포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암을 직접적이든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누구든 암에 대한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있는 셈입니다.


트라우마의 영향


암을 트라우마라고 바라볼 때 모든 암 경험자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여러 증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정신의학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의 증상은 크게 3가지가 있습니다. "사건의 재경험", "유사 상황에 대한 회피", "정서적 과각성"입니다. 사건의 재경험은 나도 모르게 암에서의 여러 상황을 다시 경험하는 걸 의미합니다. 암에 대한 생각이 머리 안에 자꾸 끼어든다거나 영화처럼 떠올릴 수 있고 반복되는 꿈으로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재경험 상황에서는 당시의 불편했던 감정이나 느낌이 동반되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런 자극이 되는 되는 상황을 피하고 도망치려 합니다. 암과 관련된 대화가 불편해서 사람들과의 만남 자체를 피하기도 하고 암을 떠올리는 병원 같은 환경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꾸 피하려 하게 되지요. 그렇지만 불편한 생각과 자극은 불현듯 끼어들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예민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정서적 과각성이라고 합니다. 나도 모르게 사소한 일에 짜증을 내고 예민해집니다. 쉽게 긴장하고 밤에 잠을 설치기도 합니다.


최근 정신의학에서는 이 세 가지 증상에 "인지 및 감정의 부정적 변화"를 추가했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전반적인 생각의 틀이나 감정의 색깔을 나쁜 방향으로 몰고 갑니다. 나도 모르게 암으로 인해서 생길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더 나쁜 방향으로 생각이 몰고 갑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생각의 결과는 극단적으로 가죠.  감정에 있어서도 마치 부정적인 선글라스를 쓴 것처럼 경험하는 모든 감정이 슬픔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런 모든 생각과 감정은 스트레스로 다가오죠. 우리의 뇌는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순간적으로 기능을 멈추어 버립니다. 마치 컴퓨터가 복잡한 프로그램 여러 개를 돌리면 버벅 거리고 심하면 다운이 되는 것처럼 우리 뇌도 순간 얼어버립니다. 일상생활 중에 순간순간 멍을 때리기도 하고 어느 한 시기의 기억이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해리 증상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트라우마로 인한 증상 중 하나입니다.


암이라는 트라우마는 결국 우리의 마음에 다양한 영향을 가지고 옵니다. 다만 여기서 외상 수 스트레스 장애가 병적인 상태로 정의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이 조건은 모든 정신질환에 동일하게 해당하는 것인데, 바로 "정신질환의 증상으로 인해 일상생활에서 대인관계나 사회적 역할에 어려움을 동반한다."는 조건입니다. 그렇기에 암이라는 트라우마를 경험했고 관련된 여러 증상이 있다고 해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질병을 가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트라우마로 인한 여러 감정의 상태는 불편하고 관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불편감으로 일상생활에 저명한 지장이 없는 정도라면 암 상황에서는 누구나 경험하는 불편함이고 이러한 관점에서 건강한 일상생활을 회복하고 지속하기 위한 관리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암 상황에선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정신과적 질환을 붙였을 때 가지고 올 수 있는 부정적 시선(stigma)은 경계해야 합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disorder)? 장해(Injury)?


비슷한 관점에서 최근 미국에서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질환을 의미하는 "장애(disorder)"가 아니라 외부 사건으로 인해 손상받은 "장해(Injury)"라고 해야 한다는 논란이 있었습니다. 주로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 상황을 경험하는 군인들 입장에서 이런 주장이 나왔습니다. 가뜩이나 군인 입장에서는 정신과 진료를 받는다는 것이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 같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정신과 질환이라는 의미의 PTSD는 진료가 필요한 군인에게 진료를 더 꺼리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적인 장애가 아니라 상황에 의한 장해로 진단명이 바뀌면 진료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 수 있다고 주장했죠. 물론 의학적 입장에서 질환을 의미하는 "장애"라는 진단명을 유지하기로 결정되었지만, 이 논의는 암 경험자의 입장에서도 동일합니다. 암과의 고통스러운 전쟁을 치르고 있는 입장에서도 그 과정 중에 자연스레 동반될 수 있는 정신적 증상을 정신적 질환으로 바라보는 것이 부담이 될 수밖에 없죠. 그렇기에 미국 국립종합암네트워크에서는 암 경험자에서의 정서적 관리를 통상적인 암 치료의 일환으로 정신과 진료라는 딱지 없이 관리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삶은 크고 작은 트라우마의 연속

우리의 삶은 어쩔 수 없이 반복되는 크고 작은 트라우마의 연속입니다. 트라우마라는 파도의 흐름이 빠르던 느리던 크건 작건 우리는 그 여러 파도를 헤치며 항해해 가는 배와 같습니다. 파도가 심하면 배는 휘청 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때론 바닷물이 선체로 밀려들기도 하고 강한 파도에 배가 손상받기도 합니다. 세찬 파도 속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수습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거센 비바람 속에 때론 아무것도 못한 채 웅크려 지금의 비바람가 지나가길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 와중에 차분히 배를 점검하고 수리할 부분은 수리하고 보강할 부분을 보강해야겠죠. 그렇게 반복되는 트라우마 속에서 우리는 꿋꿋하게 삶이라는 항해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 삶이라는 항해 속에서는 당연히 발생하는 상황입니다. 결국 삶이란 크고 작은 트라우마를 받아들이고 대처하고 수습하고 관리하는 과정을 반복해 가면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참고문헌>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2013).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In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5th ed.)

https://www.psychiatry.org/File%20Library/Psychiatrists/Practice/DSM/APA_DSM-5-PTSD.pdf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