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광Ssam Jan 23. 2023

뭐 치료는 의사 선생님이 알아서 잘해주시겠지.

당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60대 여성 A는 유방암 치료 중에 있다.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도 어느덧 반 이상 받았다. 이번 항암치료부터는 원래 계획했던 대로 항암치료약을 변경해서 치료받았다. A는 유방암 진단 시기부터 자기 의사표현이 별로 없었다. 병원도 자녀들이 서울에 큰 병원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지방에서 서울을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치료계획을 세울 때에도 주치의 교수님은 항암수술을 먼저 하고 난 이후 유방보존수술을 할 수도 있고, 유방전절제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나중에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지만, 그저 교수님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해서 전절제로 수술을 먼저 하고 지금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 치료를 받으면서 지금까지 주치의 교수님이랑 만나도 그저 인사만 나누고 괜찮다고 하고 진료실을 나온다. 분명 가족이 보기에는 이런저런 부작용이 있는데도 그저 참고 맡기는 눈치다. 그러다 이번 변경된 항암치료를 한 이후에는 뭔가 몸이 달랐다. 손발이 저릿저릿 저리고 갑자기 힘도 빠지는 느낌이 든다. 한 번의 항암치료를 더 받았는데 오히려 더 심해진다. 그런데 이번에도 진료를 가서는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한다. 참다못한 딸이 이번에는 같이 진료실에 들어가서 어머니 대신 항암치료 이후 손발이 너무 저리다고 호소했다. 그랬더니 담당 교수님은 이번 바뀐 항암제의 대표적인 부작용이 말초신경병증이라며 약을 추가해 주었고 며칠 뒤부터 증상이 나아졌다.




과거의 암과 지금의 암은 치료적으로 암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암을 치료할 때 과거라면 암 치료를 위해서 다른 건 다 희생해야 됐습니다. 암에서 살아남든가 아니면 죽던가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통증이든, 메스꺼움이든, 신체 장기의 일부를 제거하며 설령 후유 장애가 남는다 하더라도 암만 치료할 수 있다면 다른 건 다 환자가 감수해야 했습니다. 치료과정의 의사결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환자가 암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 뭔가를 결정할 수 있는 거라고는 어느 병원을 가느냐 정도였습니다. 주치의사 선생님이 정하는 대로 치료는 따를 뿐이었죠. 그 과정에서 불편함이 있더라도 어떻게 할 방법 없이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암 치료가 과거와는 엄연히 달라졌습니다. 암 치료라기보다는 암 관리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겁니다. 그만큼 암 발생이 드믈지 않고 암에 대한 여러 상황이 복잡해졌고 치료를 하기 위한 치료 방법도 다양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암에 특정 병기에서는 어떤 치료법 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통상적인 치료 가이드라인에서 환자의 상태와 환경에 따라 다양한 것을 고려해서 치료계획을 정해 나갑니다. 그 과정에서 환자 자신의 의향도 당연히 중요해졌습니다. 어떤 병원에서 치료할지, 수술을 하더라도 가급적 신체장기를 더 보존할지, 추가적인 항암치료나 방사선 치료 등을 어느 정도 수준으로 할지, 추가 치료를 입원 또는 통원으로 할지, 치료에 동반되는 여러 부작용이나 후유증을 어떤 방식으로 관리해 갈지 등등 예전에 비해 환자 자신의 의향을 반영해서 결정을 해야 할 치료 내용은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배경에는 결국 치료를 하는 과정에서 환자가 겪는 불편감을 최소화하고 치료 과정과 치료 이후에도 삶의 질을 가능한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있죠.


그럼에도 사연에서처럼 자신이 받는 치료인데 그 과정을 그 누군가에게 다 맡기고 의존하려는 환자가 있습니다. 이건 자신에게도, 가족에게도, 의료진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자신도 치료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불편감은 다 감수해야 하기에 당연히 힘듭니다. 가족 역시도 환자가 표현하지 않는 마음을 추측해 가면서 제안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곤욕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연에서처럼 서울에 큰 병원에서 치료받는 것은 환자와 가족이 함께 상의해서 경제적인 부분이나 간병하는 부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결정해야 하는데 무턱대로 하자는 대로 해 버리면 이후의 부가적인 부담이 발생했을 때 잠재적인 갈등으로 번지기 쉽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눈치를 보고 부모는 그저 자녀가 하라는 대로 한다고 할 때 바람직한 의사결정이 가능할 리 없습니다. 의료진 역시도 힘이 듭니다. 진료 시간이 여유가 있어 환자가 불편감을 먼저 이야기하지 않더라고 하나하나 물어보면서 진료를 볼 수 있는 환경이라면 참 좋겠지만 우리나라 대학병원 진료를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합니다. 환자가 먼저 불편감을 이야기해 주지 않으면 의료진도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그런 불편감 중에서 의학적으로 중요한 정보가 있는 거라면 의료진 입장에서 놓칠 수밖에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죠.


간혹 진료실에 들어가서 의사의 눈치를 보는 환자가 있습니다. 때로는 의사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잘못해서 미움을 사거나 혼이 날까 염려하기도 합니다. 만약 이런 일로 환자를 소홀히 하는 의사가 있다면 이건 전적으로 의사의 잘못입니다. 암 환자가 자신의 의사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치료 계획에 참여하고 치료 과정에서나 치료 이후 불편감에 대해 진료 상황에서 호소하는 것은 환자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동시에 내 몸을 내가 챙긴다는 의미에서는 자신에게는 의무이기도 합니다. 나는 의사에게 공짜로 진료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 비용의 건강보험료와 치료비용을 지불하고 진료를 받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눈치를 봐야 할게 아니라 의사가 눈치를 봐야 합니다. 의사는 장사를 하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의술을 펼친다고 하지만 그래도 환자를 돌봐야 하는 서비스업이 현대 의료에서 의사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현대의료는 의사 중심이 아닌 의사와 환자 간의 상호 노력이 필요합니다. 환자 역시 환자로서의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적극적으로 진료 과정에 참여하면서 치료라는 결과를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이런 과정은 의사와 환자 간에 상호 존중 관계에 기반한 소통에서 나옵니다. 


암이라는 트라우마는 인생에서 상당히 위기의 순간이고 그렇기에 어느 때보다도 하나하나 결정하는 것이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중요한 결정을 타인에게 맡기려 하는 심리는 정서적인 회피에 있습니다. 우리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힘든 상황일수록 그 상황을 외면하고 싶은 미성숙한 무의식적 심리가 있습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그 결과를 내가 책임지기 두렵기에 내가 의존할 수 있는 대상에게 의사결정을 맡겨놓고 책임도 전가해 버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 순간에는 나의 심리적 부담을 줄일지는 모르지만 무책임하고 그 결과 역시도 결국 스스로 떠 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트라우마를 내가 바라보지 않는다고 해서 그 트라우마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또한 내가 책임을 떠넘겼다고 해서 그 결과도 남에게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내 몸이고 내 인생입니다.


이런 회피적인 패턴이 있다면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중요한 위기의 순간마다 반복해 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 피해 역시로 지금까지 반복해서 감수해 왔을 겁니다. 트라우마는 우리의 삶에 위기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 삶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스스로 만약 나의 인생을 회피하듯 책임지고 살지 않았다면 지금부터라도 내가 내 인생의 방향키를 잡고 주인으로서의 노력과 책임을 다하도록 변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내 인생을 살아갈 것이고 그 과정 중에 어쩔 수 없는 크고 작은 트라우마를 마주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트라우마도 나 자신이 인생에서 마주해야 할 하나의 과정이고 계기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암환자이지만 아내이자 엄마랍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