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광Ssam Jan 24. 2023

난 이미 틀렸어. 그냥 포기하게 해 줘.

당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꽤나 예전에 대학병원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외과에서 간암으로 뇌사자 간이식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은 환자인데 치료 협조가 되지 않으니 급하게 봐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환자를 만나기 전에 몇 가지 상황을 떠올립니다. 우선 전이성 간암에서는 재발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가족 등을 통한 공여자 간이식이 아닌 뇌사자 간이식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지금은 아마 더 어려울 겁니다. 그만큼 뇌사자 간이식은 다급하고 절실하게 기다리는 대기자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간암 환자에서 간이식을 했다는 건 그만큼 간암이 진행된 상태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수술한 지 그렇게 시간이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급하게 연락이 온다는 건 수술 직후 생기는 섬망(수술 및  내과적 상태, 약물 등으로 일시적으로 뇌기능이 불안해지며 혼동된 상태)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의료기록과 검사결과를 확인해서 어느 정도 내과적 상태를 파악하고 환자에게 찾아갔습니다.


입원실에서 만난 환자는 깡마른 체구에 눈빛에 초점이 없었습니다. 간단한 질문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눈마저 질끈 감은채 귀찮다는 표정입니다. 간이식 수술도 비교적 잘 되었고 혈액 검사상에서도 딱히 이상소견이 없었습니다. 뇌기능을 불안정하게 만들만한 섬망의 원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환자가 대화를 거부하니 보호자에게 정보를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곁에는 아내가 함께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들은 환자의 이야기는 기가 찼습니다. 이 환자는 간암 진단 후 점점 삶의 의욕을 잃어갔습니다. 간암은 비교적 치료 가능한 상태였지만 간기능이 급격히 나빠져 간이식 밖에는 치료방법이 없었습니다. 가족 중에 간을 이식해 줄 공여자가 없어 답답해하던 와중, 기적적으로 뇌사자 간이식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환자가 치료에 대한 의지가 없었습니다. 모든 치료를 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환자의 입을 가족이 틀어막았습니다. 뇌사자 간이식은 빠른 시간 안에 이식을 받아야 하기에 모든 수술 과정은 급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의료진은 환자가 현재 우울증으로 치료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쳤고 중환자실에서는 수동적인 정도였는데 일반병실로 옮기고 나니 환자는 식음을 전폐하고 추가적인 치료에 대한 협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간암보다 우울증이었습니다. 간암은 이식수술을 받고 난 이후 관리만 잘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 환자에게 제일 심각한 병은 치료의 의지도, 삶의 의미도 갉아먹고 있는 우울증입니다. 적극적으로 자살시도를 하지 않을 뿐이지, 이 상황에서 모든 치료를 거부하는 건 간접적인 자살시도입니다. 뒤늦게나마 우울증에 대한 치료를 해 보았지만 우울증상은 심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약물사용도 거부했습니다. 아무리 상담으로 건강이 앞으로 나아질 수 있고 의지를 가져보자고 해도 심한 우울증으로 인해 자신의 삶은 이미 끝났다는 망상이 고착된 상태였습니다. 환자에게 들을 수 있는 말은 "나를 더 이상 힘들게 하지 말아 줘. 어차피 난 틀렸어. 그러니 이제 그만하게 해 줘."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병실로 찾아갔는데 침대가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간호사를 통해 들은 이야기로는 어제부터 가족이 모든 상황을 책임질 테니 대학병원이 아닌 호스피스병원으로 옮기겠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오늘 아침 퇴원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의료진 입장에서 느끼는 감정은 당황스러움과 절망을 넘어 분노마저 가지게 됩니다. 아주 귀한 뇌사자 분의 간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건강을 가져다주고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했을 간입니다. 그런데 이 환자는 그 누군가의 삶을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 줄 기회를 빼앗아 스스로 저버린 셈입니다. 뒤늦게라도 그 우울증을 치료하지 못한 의사로서 자괴감과 더불어 도망치듯 퇴원해 버린 환자와 보호자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지금도 그 당시를 떠올리면 답답하고 안타까운 기억입니다. 의사로서 당시 조금 더 일찍 그 우울증을 파악했더라면, 혹은 그때 이런 시도를 더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남습니다.


물론 지금에는 장기 이식 상황에서 이런 일은 드믈 겁니다. 지금은 이식 수술을 하기 전 단계에서 이식을 받는 사람의 정신적인 상태를 사전에 평가하고, 공여자 이식이라면 장기를 기증하는 공여자의 실제 기증 의사와 정신적인 상태를 함께 평가하도록 제도화되어 있습니다. 사연에서의 상황은 이미 꽤 예전의 상황이라 이런 제도가 충분히 자리를 잡기 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암 환자가 실제적인 의료적 상태와 상관없이 정서적으로 우울 증상이 심할 때 나타는 잘못된 결과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암을 관리한데 있어서 정서적인 관리를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암 상황이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암 치료를 포기하게 되는 가장 흔한 이유는 우울장애입니다. 우울증을 단지 기분이 우울한 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만, 우울한 기분은 단지 기분을 떠나 우리의 에너지와 생각 등 다방면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에너지는 의욕이나 활력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우울증이 있으면 만사가 귀찮고 의욕, 식욕 등 삶의 욕구가 떨어지고 활동량도 줄어들게 되죠. 우울한 기분은 생각에도 영향을 줘서 마치 색안경을 낀 듯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판단을 다 부정적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렇다 보니 희망이 분명 있음에도 모든 결과가 다 나쁜 방향으로 갈 거라고 절망으로 착각해 인식해 버립니다. 이런 생각의 왜곡이 고착화되면 망상으로 악화됩니다. 우울증이 심해지면 피해망상, 빈곤망상, 죄책망상이 동반되고 자살사고 역시도 이런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상황이 절대 삶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 아님에도 그렇게 인식해 버리면서 삶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왜곡된 신념이 생기는 거죠. 당연히 이런 우울증상은 암을 치료하고 관리하는데 심각한 지장을 줄 수밖에 없기에 암 관리 과정에서 병행해서 평가하고 치료하는 게 필요합니다.


암 상황에서 치료를 거부하는 다른 이유로는 의료진에 대한 불신도 있습니다. 가끔이지만 치료를 거부하는 암 환자 중에는 자신이 병원에 가서 오히려 암 치료라는 이유로 몸이 망가졌다고 생각하고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병원에서 자신을 마치 실험대상으로 여기고 수련 중인 젊은 의사들이 자신의 몸을 함부로 대하고 실습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암 때문에 생긴 여러 신체 증상을 의사가 치료를 잘못해 놓고 암 핑계를 댄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울증이나 망상장애 등 정신과적 증상으로 이런 피해망상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의료진과 소통이 되지 않아 오해가 누적되면서 발생하기도 합니다. 암 진료과정에서 충분한 설명이 없이 통보식으로 의사전달이 반복되면서 환자 입장에서 기분도 상하고 잘못된 판단도 하게 되는 거죠. 정신과적 증상의 문제라면 관련 치료가 필요할 것이고, 소통의 문제라면 암과 관련된 상황을 차분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병원에서의 환경이 필요할 겁니다.


암의 상황에서는 때로 안타깝게도 기대하는 치료의 결과를 얻지 못하고 낙심하는 상황도 찾아옵니다. 암에서 무조건적인 희망만 있는 상황은 아니기도 합니다. 그런 일부 상황에서라면 암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과 삶에서의 좌절이 자연스레 우울한 감정으로 이어지고 더 이상의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최근에는 웰다잉, 존엄한 죽음이라는 측면에서 의사조력사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실제 스위스 및 캐나다 등 일부 국가에서는 관련 영역이 의료영역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법제화에 대한 논의가 있습니다. 통상적인 암의 상황에서는 고민의 영역이 아닙니다만, 일부 말기암 상황에서는 삶의 마지막 상황에서 자신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인 고려대상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과 죽음에 대한 의사결정은 죽음의 입장이 아닌 삶의 입장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나의 삶의 의미와 가치는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여러 고난과 성취를 반복해 가면서 이어져 온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 나의 상황이 절망에 있다고 해서 나의 모든 의미가 소멸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령 존엄한 죽음에 대한 가치를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내가 가져왔고, 남은 삶동안 가지고 갈 삶에 대한 소중한 가치도 존중하면서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삶은 온전히 나 혼자만의 영역이 아니라 가족을 포함한 공동체의 영역에서 가지는 의미도 있습니다. 솔직히 저에게도 이 주제는 아직 너무 어려운 영역이지만 그럼에도 우리 사회가 시간을 들여 다각도로 깊은 논의를 통해 제도화해 나갈 필요가 있겠습니다. 언제가 우리 모두가 맞닥 뜨릴 죽음의 과정도 삶의 과정만큼 존중받고 감당해야 할 "삶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437/0000328739?sid=102


매거진의 이전글 뭐 치료는 의사 선생님이 알아서 잘해주시겠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