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멀리한 시간이 길다. 서른넷 까지 책 속에 파묻혀 지내던 나는 임신과 출산 이후 마치 책을 가까이한 적이 없었던 사람처럼 살아왔다. 나를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소비하고 살아왔던 기나긴 시간들은 내가 품고 있다가 세상에 내어놓은 자그마한 생명체에게 바쳐졌다.
먹고 자고 씻고 화장실을 가는 것 모두 아이에 의해서 아이를 위해서 이루어졌다. 그 시간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답답하고 암담함을 느끼던 날들을 지나 이제 나 자신의 욕구를 인지하는데 무감각해졌을 때 쯔음 문화센터에서 알게 된 아기 엄마의 권유로 입소 대기 신청을 해두었던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왔다.
아이가 적응하지 못하고 나를 찾아 목에 핏대를 세우며 우는 상상을 하면 뒷목이 저릿해졌지만 나는 생각보다 길게 고민하지 않고 아이를 입소시켰다. 처음 일주일은 엄마와 같이 한 시간, 그다음 일주일은 엄마 없이 한 시간, 그다음은 두 시간... 이렇게 한 달의 적응기간이 끝나고 마침내 아이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보내게 된 날, 나는 생각보다 기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았고 기분이 이상했다. 무언가 엄청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 근처 서점을 찾았다. 뚜렷한 목적이 있던 게 아니어서 나는 그저 어슬렁어슬렁 매대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문구 코너에 다다라서 예쁜 노트들과 색색의 볼펜들을 보고 한참을 만지작 거리다 몇 개 골라 들어 계산을 했다. 그리고 카페에 가서 커피를 한 잔 시켜놓고 노트와 펜을 두고 앉았다. 평소 휴대폰에 캡처해두거나 저장해두었던 시나 좋은 글귀들을 옮겨 적을 셈이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노트를 곱게 펼치고 펜을 쥐었다. 노트 왼편에 놓아둔 휴대폰의 화면을 보며 한 문장씩 옮겨 적었고 한 문단을 다 적은 뒤에는 기분이 언짢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 한 편을 전부 옮겨 적은 뒤에 나는 노트를 찢어버렸다.
나는 명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필도 아니었다. 어른스럽고 기품 있어 보이는 궁서체를 동경했지만 내 글씨는 고딕체에 가까웠다. 그런데 노트에 옮겨진 시는 말 그대로 이제 막 글자를 배운 아이의 글씨체로 쓰여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시를 옮겨 적어 놓고서도 그 시의 내용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늘 손으로 옮겨 적으며 공부를 하던 습관 때문에 글을 적지 않게 썼고 펜이 손안에 쏙 쥐어지는 느낌과 펜 촉이 지면에 미끄러져 내리는 감각에 익숙했었다. 아름다운 글씨는 아니어도 깨끗하고 정갈하게 적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24시간 아이를 돌보고 씻기느라 부어오른 손가락 마디마디와 시큰거리는 손목은 펜을 쥐고 힘을 주는 것조차 어렵게 했다. 심지어 방금 옮겨 적은 시가 무슨 내용인지 기억이 안 나다니.
나는 당혹스러웠고 이내 부끄러웠고 그다음에는 화가 났다. 누구를 향할지 모르는 화라서 곧이곧대로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첫 장부터 찢겨나간 노트가 그러게 네가 뭐하러 이걸 샀어,라고 말하는 것 같아 속이 뒤집어졌다.
이게 뭘 그렇게 속상해할 일이냐고, 시간이 지나면 그 감각이 돌아올 거라고 머리에서는 말했지만 가슴에서는 지난 시간 동안 굳은 건 너의 손가락뿐이 아니야, 네 머리도 굳었어.라고 비웃었다.
알고 있었다. 육아서를 읽을 때에도, 휴대폰으로 짧은 뉴스들을 볼 때에도 그리고 가끔 먼지를 닦으며 펼쳐보았던 전공서적들을 눈으로 훑어 내릴 때도, 내 눈이 활자 위로 미끄러지는 속도를 뇌에서 따라잡지 못해 몇 번이나 다시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읽었다. 검지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어가며 입으로 소리 내어 읽던 엄마의 모습이 내 모습 위로 겹쳐졌고 그 순간 나는, 아이를 낳고 뼈마디가 시리고 흰머리가 처음 생겼을 때 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나의 늙음에 대해서 인지했다. 육체적인 늙음이 아니라 뇌의 늙음을 느낀 기분이었다. 엄마가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었던 이유는 헷갈려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단어를 짚어가며 머리에 제대로 집어넣어 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자 함이었다는 걸 깨달은 거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카페에 앉아 느긋하게 책을 읽고 글을 쓰기만 할 수 있다면, 원래의 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있었던 거다. 테이블에 놓인 찢기고 구겨진 종이 조각이 꼭 그 마음들 같았다.
그 뒤로 틈만 나면 책을 읽으려고 했다. 어느 날은 아이가 낮잠을 오래 자주면 책 반 권은 읽을 수 있었고 어느 날은 바스락, 하고 책장 넘기는 소리에 깨어 채 한쪽을 읽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책을 빨리 읽는 것이 꽤나 숙련이 되어 하루에 한 권은 읽을 수 있는 나였는데, 한 권을 일주일 안에 완독 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저 글자를 눈으로만 훑어내리는 날도 있었고 내용에 빠져들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읽는 날도 있었다. 어느 날은 공부했던 이론서를 읽고 어느 날은 너무 여러 번 읽어 다 찢어진 옛 소설을 읽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시집을 읽었다. 내용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어떤 것이 다시 나의 스위치를 켜고자 하는 발악이었다.
일 년 반이 지난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다. 책의 흐름을 끊어가며 읽는 것에도, 눈으로 활자만 스캔하며 읽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앞 장으로 돌아가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읽어나가는 것에도. 그리고 그 감각을 잊지 않으려고 어디든 어떻게든 글을 조금씩 쓰려고 한다. 아마 이것이 그 시작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