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2030에게
유난히 기억력이 좋아 쓸데없는 것까지 시시콜콜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의 삼십 대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통째로 사라진 거예요.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았나 봅니다. 요즘 불쑥 삼십 대 어느 날 저녁 5시쯤이 기억났어요. 무엇을 어찌할 바 몰라 울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그때 제게는 7살 딸아이가 있었고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가려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막막했던 그날 저는 마른오징어만큼이나 쫄고 쫄았습니다. 그때의 저를 위로하며 이 글을 씁니다.
며칠 전 짧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일행은 7명이었는데 한 사람이 제 눈에 자꾸 들어왔어요. 그녀는 말이 없었습니다. 차 안에서도 희미한 미소 외에는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마치 없는 사람처럼 조용했어요. 그런데 식사 준비를 하거나 설거지, 뒷정리를 할 때는 언제나 그녀가 맡아서 하고 있었어요. 밥을 먹다가도 어떤 반찬이 부족하면 조용히 반찬을 채워놓고 물이 없으면 물을 가져다 두었습니다. 저는 불편했어요. 하지만 이제 2회 차 참석자가 단체에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었고 서로 이해되는 부분이 있나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밤중에 달구경을 핑계 삼아 그녀와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었어요. 저는 들어주기만 했어요. 여행을 다녀온 다음날 그녀가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얘기를 들어줘서 고맙다고. 저는 답했습니다. 그저, 쫄지 말자고.
저는 쫄보였어요.
제가 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백가지가 넘지만 몇 가지만 얘기하자면 아버지 없이 자란 환경, 내세울 수 없는 학벌, 평범하기 짝이 없는 외모, 작은 키, 지방 출신, 힘도 없고, 겁은 많은, 친구는 많지 않은 그런 '어린 여성'이었습니다. 세상은 하이에나가 득실대더라고요. 제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큰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결혼을? 멀쩡한 집안에?"
큰어머니와 관계가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없이 자란 제가 '멀쩡한 집안' 사람과 결혼한다는 게 너무 뜻밖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뒤로 큰어머니를 다시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어른'이라는 사람들에게 반감과 의심이 깊어졌습니다. 그 날이후 저는 모든 일에 자신이 없어졌어요. 아버지의 부재는 우리 사회에서는 형벌이었어요. 매사 눈치가 보였고, 아니나 다를까 스스로 쫄보가 되자마자 세상은 제게 혹독하게 막 대했습니다. 세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이겨내는데 자그마치 이십 년이 걸렸습니다. 누군가 아무렇게나 던진 말 한마디의 파괴력은 끔찍했었습니다.
세상은 주눅 들어 있는 사람을 동물적으로 알아봅니다. 혹시 쫄아있다면, 어깨부터 쫙 펴세요. 긴 숨 한 번 쉬고, 적어도 내 잘못이 아닌 일로 쫄 필요는 없어요. 알고 보면 대단히 '대단한'사람도 별로 없어요.
쫄지 말고 우아하게!
그대들을 응원합니다.
세실자영업자
예술을 사랑하는 영어 선생입니다. 존 버거를 존경하며 그의 삶의 태도를 본받으려 합니다. 자유로운 영혼의 아이를 기르면서 제 영혼마저 해방된 운이 좋은 엄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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