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가 되고 싶어 했던 아이에게-
<한 명의 예술가가 탄생할 때까지 10가지 이야기 중 1-1이야기>
아이는 주먹을 쥘 수 있을 때부터 연필과 크레파스를 쥐었다. 아기때도 종이만 보면 선을 그었는데 어느날은 깜빡 낮잠이 든 동안 혼자서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말을 할 수 있을 때부터 아빠, 엄마, 나무, 순서로 낱말을 익히고 그 다음 차례가 ‘화가’였다. 네 꿈이 뭐니? 하면 언제나 화가예요. 라고 답했다. 이 글은 화가가 되고 싶어했던 아기가 한 명의 ‘아티스트’로 자라나기까지의 기록이다.
돈이 많이 든다는 생각에 겁이 나기도 했었다. 아이의 아빠는 오랫동안 공부를 한 사람이기에 예술 교육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때의 나처럼 고민하고 있을 수많은 예술가의 부모님들, 그리고 학생들을위해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을 인생의 첫 번째 소원으로 꼽는다. 짧게는 20년, 길게는 40년 이상을 지속해야 하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다면 참으로 낭패이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부모가 되어 가장 크게 고민해 온 것은 아이가 ‘하고 싶은 일’을 찾도록 돕는 것이었다.
아이는 3살 무렵 손가락에 힘이 없어 주먹으로 색연필 또는 크레파스를 쥐고 그림을 그렸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낙서였으나, 누구나 그렇듯 우리 애가 천재인가 하는 믿음이 생길 정도로 아이 그림의 형태나 색채는 다채로웠다. 필기구가 보이는 대로 그리고 색칠을 하길래, 4살 무렵엔 온 방을 흰 전지로 도배를 하고, 파버카스텔이나, 신한 전문가용 물감을 구입해 함께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온 방이 난장판이었다. 당시 중단한 학업을 다시 시작한 남편과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나는 안정된 벌이가 없었지만, 어릴 때 처음으로 체득한 색채감각이나, 음감은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에 동의했고, 돈이 생기는대로 제법 값비싼 크레파스와 물감, 스케치북을 사다 날랐다. 칸딘스키 말에 따르면 색채는 심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데 화구가 아무리 비싸도 심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림책도 꽤 큰 지출 목록이었다. 당시 교원이나 유명 출판사의 ‘세트’ 책들이 많았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가격이었기에 일요일마다 교보문고나 어린이 동화책을 전문으로 파는 서점을 찾곤 하였다. 책을 고르는 기준은 내용뿐 아니라 그림도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는데 요르크 뮐러나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작가의 작품들이 기억에 남는다. 보리출판사의 세밀화나 달팽이 과학동아도 무척 아꼈던 책들이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은 따라 그리기도 했었는데, 물론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즈음 아이는 <화가>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화가-작가>는 그녀의 꿈이자 현실로 자리 잡고 있다.
일하는 엄마는 아이를 어딘가에 맡겨야 했고, 아이는 방과 후에 미술 학원을 다녔다. 액자도 만들고 상상화도 그리고 무엇보다 친구들이 있었다. 아이를 맡기며 될 수 있는 한 어른 손이 가지 않기를 바란다고 부탁드렸었다. 완벽한 그림보다는 본인의 감정이 들어간 그림을 그리기를 바란다고 부탁드렸었는데, 이유는 맞벌이를 하는 부모 탓에 혹시나 감정 표현에 소홀할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선으로나마, 또는 색으로나마 자신의 감정을 털어버리기를 바랐다. 검은색이 많은 그림을 그려올 때는 은근 걱정도 되었으나 ‘이건 안 예쁜 색’이라고 구분 지은 적은 없다. 모든 색은 저마다의 가치로 아름다울 자격이 있으니까.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미술 선생님이 예중 진학을 권하셨는데 한마디로 그럴 계획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무엇보다 중학교부터 진로를 미리 결정짓는다는 사실이 부담이 되었고, 예체능과정을 뒷받침할 자신도 없었다. 그런 학교는 돈 걱정이 없는 사람들의 자녀들만 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나의 노동의 대가는 철저히 시간을 담보로 하고 있었기에 우아하게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하는 등의 뒷바라지는 꿈도 못 꿀 상황이었다. 아이는 조금 서운해하는 눈치였지만 말을 아꼈다. 그때는 나도 철이 없어서, 예중 입시에 들이는 화실 비 대신 그 돈으로 아이랑 둘이 배낭여행을 가자고 꼬드겼다. 실은 비교적 일찍 아이를 낳고 친구들이 자유로울 때 이 아이가 제 배낭을 질 나이가 되면 유럽여행을 가겠노라 단단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어려운 살림에도 10년이 넘게 푼돈을 모아 여행 자금을 마련했다. 여행 계획 기간은 50 일 정도였고, 이탈리아부터 영국까지 대략 6개국을 일주일에서 열흘간 머무르기로 했는데 서른일곱의 나는 신혼여행을 제외하곤 외국에 가 본 적이 없었으며, 더욱이 홀로 여행은 난생처음이었다. 다들 난리가 났다. 어디를 간다고?! 애를 데리고?! 연락은 어떻게? 어디서 자고? 길은 어떻게 찾고? 몇 나라는 영어도 안 통하는데! 언제나 그렇듯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무장한 나는 주변의 걱정을 대충 안심시키고-사실 나도 방법이 없었다. 그저 가고 싶은 마음이 그 위험보다 컸을 뿐, 유럽 배낭여행을 가기로 결심을 했다. 그때가 2007년.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복병은 학교였다. 일주일 외엔 다 결석 처리라고 말씀하셨고, 가족회의 결과(거의 나의 주장) 혹시 졸업 일수가 부족하면 검정고시로 중학교를 가기로 결론을 내렸다.
예중 진학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2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