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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실 Apr 29. 2022

무엇이 되어도 좋고
무엇이 되지 않아도 좋아. 2-2

-예술가가 되고 싶어 했던 아이에게-

<첫 글에 이어 2회가 연결됩니다.>



구글맵이나 스마트폰도 없었고, 오로지 ‘론리 플래닛’에 의존하며 50일간의 계획을 세웠다. 다빈치, 미켈란젤로를 비롯해서 현대 미술의 거장들의 작품까지 눈이 짓무르도록 보고 또 보았다. 당시 아이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었고 카라바지오나 렘브란트 그림 등에 무척 흥미를 보였었다. 대충 선만 그려진 종이 지도를 들고, 배낭을 메고 끌면서 그림을 보고, 조각을 느끼고, 자연을 품은 시간이었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고흐가 숨을 거둔 방안에 둘만 있었을 때의 고요가 생각난다. 침대는 말할 수 없이 초라했고 방금이라도 고흐의 고통스러운 숨소리가 들릴 듯했다. 돌이켜 생각하니, 예중 진학 준비 비용으로 여행을 갔었지만 오히려 예술에 대한 열망을 절절히 키워준 여행이 아니었나 싶다.     


 50여 일에 걸친 여행 끝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행도 공부라는 신념을 가진 선생님 덕분에, 다행히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고 아이는 6학년 5월부터 예중 진학 준비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다들 이미 늦었다고 했고, 미술 학원에서도 가능성이 없다고 얘기했다. 나는 13살 아이에게 ‘늦거나 가능성 없는’ 일이 뭐가 있겠냐고 반문했고, 부담 가지시지 말고 5개월 동안 입시 준비를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또한 학교 학업과 영어 공부는 지속할 수 있도록 시간표를 짜 달라는 부탁도 함께 드렸다. 한마디로 ‘엄청 말 안 듣는 학부모’였다. 아직 아이는 13살이었으니까. 나는 아직도 그 결정이 옳았다고 믿는다.   

   

 운이 따랐다. 수채화에서 ‘개’가 주제로 나왔었는데 아이는 반려견을 몹시도 키우고 싶어 하던 ‘개 박사’였고 하루에도 몇 마리씩 그리곤 했었기에 큰 어려움 없이 원하는 ‘개’를 그렸다. 이렇게 다들 힘들 거라던 예중에 합격을 했다. 초등학교 시절 학업, 독서, 그림을 함께 지속했기에 그림만 하루 10시간씩 그린 친구들보다 수월하게 성적을 얻곤 했지만, 생활수준이 워낙 다른 환경에서 약간의 위축 기간이 있었음은 인정해야겠다. 하지만 타고난 성정이 워낙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는 터라 곧 개의치 않았다.  

   

 예고를 진학했다. 소묘와 수채화가 주된 수업이었던 예중에 비해 동영상, 자유 매체 작업, 조소 등 다양한 수업과 자유로운 분위기가 숨통을 트여 주었다. 그때부터 유튜브(youtube)를 끼고 살았던 것 같다. 유튜브는 해방구였다. 물론 선정적인 영상과 ‘부모 마음’에 들지 않는 콘텐츠를 볼 때에는 걱정도 되고 거슬리기도 했었지만 이미 정신적으로 내 품을 떠난 아이에게 하나하나 간섭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화를 많이 했다. 학업에 대한 부담, 예술관, 예술가의 가난한 삶에 대한 태도 등등. 예술가는 가난하다는 일반적인 명제가 아이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나는 굳이 예술가도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설득하기보다는 ‘가난할지도 모르지만’ 가고 싶은 길을 가는 것이야말로 인생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라고 위로했다. 혹시 너무 가난하면 내가 가끔 먹고 싶은 거 정도는 사줄게 하며 시시한 농담도 아끼지 않았다. 이미 중학교, 고등학교 입시의 경험이 있었지만 대학 입시의 부담은 또 다른 무게였기에 그 당시 우리를 견디게 한 힘은 ‘시시한 농담들’이었다. 아이는 사설 화실을 거의 다니지 않았다. 비용도 문제였고, 학교 실기만으로도 체력이 달렸고, 남는 시간엔 학업도 병행해야 했다.      

 

아이는 원하는 대학 서양학과에 진학했다. 그녀의 대학생활은 파란만장했다. 억지로 막아 둔 호기심이 폭발하듯 터져 나와, 하고 싶은 것들로 넘쳐났다. 희한한 옷을 입고 다니고, 유튜브로 타투를 배우기도 하고 연극을 하는 등 거칠 것 없이 스물을 누렸다. 대학 3학년이 되고 평면작업만 하기에는 답답하다며 복수전공으로 조소를 신청했다. 그림을 그리고 돌을 깎고, 나무를 다듬는 등 원 없이 작업을 하며 모호하게나마 평생 놓치지 않았던 작가의 길에 조금씩 다가가는 시간이었다. 지난봄, 마침내 아이는 서울대 서양화, 조소 두 개의 학위를 받으며 졸업을 했고, 2019 9월,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 온 학교 ‘전문가:Master’ 과정에 진학 했다. 

   

 ‘예술가는 가난하다.’는 명제는 여전히 아이에게 두려운 명제이다. 그러나 바뀐 것이 있다면  ‘그러할지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의지와 결심이 단단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생을 나무에 비교한다면 이제 겨우 뿌리를 내린 정도에 해당하겠다. 무엇이 되어도 좋고, 무엇이 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주먹으로 색연필을 쥐고 진지하게 ‘낙서’를 하던 그때의 열의를 평생 가져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지난 시간이 찰나와 같다.                     



***이어 <줄넘기를 잘하는 화가가 되고싶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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