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다시, 5월18일

기억해야만 합니다.

by Leena

어린이도, 이제 막 성년이 된 청년들도, 어버이도, 스승도, 더불어 부처님까지도.

저마다 하루씩 맡아 서로를 축하하고 축복하며 보내기에 마음이 분주한 오월입니다.


해마다 5월이 되면 내 마음은 이상하게도 더없이 차분해집니다.

지나간 유년시절 은사님들의 얼굴이, 그 눈동자가 눈앞에 아른거려 숨을 깊이깊이 쉽니다.

어린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무거운 표정과 슬픈 눈동자를 기억합니다.


나는 태어나 스물다섯 해를 광주에서 자랐습니다.

내 어머니 역시 평생을 광주에서 보낸 분이셨고, 일가친척 대부분이 가까운 곳에 살았습니다. 내 어머니 연배이거나 혹은 더 연세가 있으셨던 나의 선생님들 또한 대부분 그곳에서 나고 자란 분들이셨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그해 스승의 날이 기억 속에 선명합니다.

나의 은사님은 언제나 반달눈을 하고서는 온유하고 인자한 성품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던, 화 한번 낼 줄 몰랐던 분이셨는데 그해 스승의 날을 앞두고서는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어떤 선물도 받지 않겠습니다. 나는 선물을 받을 만큼 자격 있는 스승이 아닙니다.
잘 한 것 없는 부끄러운 스승입니다."

그는 모든 선물을 마다하셨습니다. 작은 카네이션까지 기어코 사양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그의 성품에서 비롯된 겸손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우리 선생님은 참 겸손한 분이구나.
으레 그 날이 되면 선생님께 선물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여겨지던 때였습니다. 전날부터 아이들과 함께 교실을 꾸미고 선생님 몰래 깜짝 파티를 기획하고. 학부모 일일교사 등의 특별한 활동으로 수업 없이 하루를 보내던 시절이었습니다.


스승의 날로부터 사흘이 지나 5월 18일이 되었고,

언제나 온유하던 나의 선생님은 웃음기 없는 얼굴을 하고서 단단한 말투로 말씀하셨습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잊지 않고 오래오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날 함께 5.18 민주화운동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아직 어렸던 초등학생 우리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실 앞에서 무서워 퐁퐁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식 같은 당신들 먹이겠다며 주먹밥을 만들어 나와 나눠주는 아주머니들과 그 밥을 먹으며 주먹을 단단히 쥐고 집회로 나가는 광주 시민들을 보면서 다큐멘터리 속 그들이 어쩐지 더욱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그 비디오를 몇 번이고 봤을 나의 선생님은 그날도 굵은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리며 울었습니다. 그때 나는 그저, 그 눈물을, 선생님도 무섭구나 선생님도 감동했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몇 번의 5월 18일을 더 보내고서 성인이 된 나는 또다시 돌아온 5월 18일, 5.18 민주화운동 생존자 인터뷰를 읽다가 숨이 턱 막혔습니다. 살아있는 것이 부끄럽다는 그의 고백에서 나는 내 스승을 보았습니다. 내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내 선배를 보았습니다. 내 이웃을 보았습니다.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먼저 가신 분들께 죄송해 부끄럽다는 그들의 고백에 내 마음 안에 생채기가 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의 스승은, 당신이 살아서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고 선생님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죄스럽고 부끄러워했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스물둘 어린 나이에 이대로 죽을까 두려워 오월의 더운 저녁을 총알도 엉켜서 못 뚫는다는 목화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 채 방안에서 버텼던 일을 부끄러워했습니다. 나의 삼촌은, 함께 대학을 다녔던 친구를 잃고 끝내 시신도 못 찾은 그를 두고 홀로 졸업해야 했던 일을 부끄러워했습니다. 나의 이웃은 아빠 없이 키워내야 할 아이에게 아빠를 그렇게 만든 이의 안녕을 전하는 뉴스를 보며 부끄러워했습니다.


학창 시절 봄마다 가을마다 소풍 다녔던 도시의 구석구석이, 친구들과 함께 걸었던 시내의 이길 저길이, 꽃다운 20대의 시작을 함께한 내 대학 캠퍼스 곳곳이, 성장하며 밟은 땅 구석구석이 알고 보니 518 사적지입니다. 먼저 간 이들의 붉은 피가 방울방울 떨어졌을 곳들입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나의 오늘은 80년 5월 18일과 멀지 않습니다.

스물다섯, 여태껏 자라온 광주를 떠나 삶의 터전을 옮기면서 나는 참 큰 슬픔을 경험했습니다. 80년 5월 18일 광주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많았고, 어쩌면 모르는 이보다 더 많은 이들이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고, 무슨 열심에선지 가슴 아픈 그날을 폄훼하고 그날의 광주 정신을 훼손하고 있었습니다. 민주화운동이라는 말 대신 사태나 폭동, 심지어는 빨갱이라는 단어까지 입에 올렸습니다.


아픔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는 살아있는 것이 부끄러운 수많은 광주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들의 아픔이 언제쯤 아물 수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80년 5월 18일의 광주를, 깊은숨을 고르지 않고서도 쉽게 말할 수 있는 그들이 참 다른 면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광주에 5.18 민주화운동으로 인한 국가 유공자가 유난히 많아, 광주에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 힘들다는 소문이 있다고 합니다. 사실이든 아니든 나는 이 소문을 듣고 마음이 참 많이 아팠습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유명을 달리했구나 하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서글퍼졌습니다. 광주광역시 시청은 국가 유공자로 지정된 "민주화운동 의사자들과 유족들에게 특혜를 줘도 되느냐"는 항의하는 전화를 지금도 하루에 수 없이 여러통 받는다고 합니다. 나는 그들이 부끄럽습니다. 너무도 부끄러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름을 느낍니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는 부끄러움입니다.


2014년 4월 16일.

그 날은 나의 스승님처럼, 나의 엄마처럼, 나의 삼촌처럼, 나의 이웃처럼, 나 또한 "살아있어서 부끄러움"을 느꼈던 날입니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그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별처럼 사라져 간 희생자들 앞에서 부끄러워졌습니다. 언제까지 세월호 이야기냐, 그만하라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폄훼되고 상처 투성이가 되었던 5.18을 떠올립니다. 슬픔의 한가운데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버티고 선 유족들 앞에서 보상금이나 거론하던 마음이 천박하기 그지없는 이들에게서 5.18 국가유공자를 거론하던 이들을 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잊지 않고 오래오래 기억해야 합니다"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진정한 사과가, 참회가 있을 때까지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아침 뉴스에서 발포와 관련된 진실을 봅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습니다. 비록 오래 걸릴지라도 결국에는 진실이 밝혀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낯선 뉴질랜드 땅에 정착하기 위해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던 때의 일입니다.

오클랜드 시내 한 중간에 위치해있던 카페에는 다양한 손님들이 머물렀습니다. 매일 점심시간에 신문하나를 들고서 찾아오는 나이 지긋한 백인신사가 있었습니다. 언제나 친절했던 그는주문 전에 꼭 몇마디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어느날엔가는 내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해외에 나와 살면서 놀랐던 점 하나는 한국 (South Korea)를 모르는 이가 생각보다 참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한국을 알까 싶은 그에게 "나의 고향은 한국의 남쪽도시 광주"라고 말해주면서 큰 기대 없었는데, 예상외로 그는 별스럽게 나를 반가워했습니다. 대학에서 동양학을 가르친다는 그는 "민주주의 (Democracy)의 도시에서 왔구나!" 라며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자신이 느끼는 경의로움을 한참동안이나 내게 토해냈습니다. 내 나라의 사람들보다도 80년 5월의 광주를 더욱 자랑스러워해주는 그를 보며 참 감사했습니다.


나는 이 글을 쓰기까지 오래오래 망설였습니다. 여러모로 닮아있는 5.18과 4.16 앞에서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오늘의 우리를 살게 한 당신들을 떠올려보는 2017년 5월 18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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