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떠올라 마음을 송두리째 흔드는 어떤 기억들
어떤 바람, 어떤 빛깔, 어떤 시간, 어떤 냄새, 어떤 공간, 또 어떤 이.
불현듯 마음에 떠올라 가던 걸음을 멈추고서, 깊이깊이 숨을 들이쉬게 만드는 기억들이 있습니다.
어떤 기억은 시간이 갈수록 더 또렷해집니다. 잊지 말아달라고 뇌의 저 한 구석에서 불시에 신호를 보내는 것만 같습니다.
당신은, 내가, 아직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요.
아니 어쩌면 영영 잊고 싶지 않거나 사실은 제발 잊고 싶어서 더욱 잊히지 않는 것들일 수도 있겠습니다.
예닐곱 살쯤 이었나 봅니다.
나는 천운장 이모집에 가는 일을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머리를 오래오래 빗겨주신 후 서너 갈래로 꼭꼭 땋아 올려주시던 이모의 손길이 좋았고, 동네 어귀에 다다르면 풍겨오던 짙은 나무 냄새가 좋았습니다. 나는 아직도 그 오래된 아파트의 방과 방, 현관에 들어서면 마주 보이던 작은 창고, 그 위에 걸려있던 나무액자, 오래된 나무책상, 주방 옆 좁은 베란다의 식혜를 기억합니다.
나는 곧 잘 '천운장 이모집에 가자'며 엄마를 졸라댔었습니다.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큰 탄광이 들어서 있었던 마을, 천운장. 어린 나는 이' 천운장'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이모 대신 천운장 이모, 이모집 대신 천운장 아파트. 꼬박꼬박 이름 붙여 불렀습니다.
그 동네 이름이 실은 오곡마을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다자란 후에야 알게 됐습니다.
마을의 광업소가 그 지역 경제를 좌지우지할 만큼이나 호황이었던 시절, 그 동네를 찾아오는 내빈들이 어찌나 많았는지 그들을 위한 영빈관(迎賓館)이 지어졌을 정도라고 합니다. 천운산의 빼어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영빈관 건물을 올린 후, 천운장이라 이름 지었는데 이후에 어느샌가 마을 전체가 천운장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탄광촌 천운장에는 나무가 참 많았습니다.
모두가 큰 나무라 부르던 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큰 나무로 모여라 - 누구라도 외쳤다 치면 마을의 꼬마들 모두 순식간에 약속한 것 마냥 그 나무 앞에 모였습니다. 구부러진 나무 등을 타고서 한 발 한 발 오르다 보면 어느새 마을 어귀 운동장이 내려다 보일만큼 높이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래요, 나는 기껏해야 예닐곱 살 정도였을텐데 그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던 아득한 동네 풍경과 마을 어귀 운동장만큼은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합니다. 운동장의 계단은 또 얼마나 높았는지요. 두 주먹을 꼭 쥐고 힘을 다해 펄쩍 뛰어야만 나는 그 계단을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알까요?
내가 천운장을, 큰 나무를 잊지 않고 여즉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시간들이 지금까지도 마음속 한 구석에 고이고이 고여있다는 사실을.
생각지도 못했던 아주 보통의 날에 불쑥불쑥 그날의 향기가,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는 것을요.
잊히지 않습니다. 그래요 아직도요.
- 수취인 불명의 편지를 써보려 합니다.
잊히지 않는 기억들을 차곡차곡 모아봅니다.
나의 이야기가 당신에게 가 닿을 수 있을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