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텅 빈 도시에서 외로운 춤을 추곤 해
8월이다. 파리의 8월은 지나치게 쓸쓸하다. 자주 들리던 꽃집, 빵집, 레스토랑, 바. 카페 가리지 않고 전부 문 앞에 메모 하나를 남긴 채 긴 바캉스를 떠났다. 검색하는 곳마다 바캉스로 문이 닫혀있을 때 비로소 실감한다. 프랑스인들에게 여름휴가가 어떤 의미인지. 한국의 고속터미널 역을 방불케 할 만큼 붐비던 출근길 지하철 역시 텅텅 비었고 운이 나쁜 몇 명의 사람들만이 오피스가 몰려있는 종점까지 향한다. 작년 이맘때는 한국을 다녀오느라 몰랐던, 2년 만에 돌아온 텅 빈 계절을 마주한 나는 떠나지 못하는 이 도시에서 다시금 8월 블루스를 맞이한다.
인턴으로 출근한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3일은 오피스에 출근, 이틀은 재택을 하는 사이클로 살고 있다. 그리고 인턴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원은 2주간의 여름휴가를 갖는다. 요즘 회사가 텅텅 빈 이유다. 현재 내 매니저도 시차가 있는 미국으로 휴가를 가 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일 시키는 사람이 없다. 보통 한국이라면 자신이 없는 동안 해야 할 일을 폭탄으로 던져 주고 가겠지만, 여기서는 원래 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프로젝트 하나를 일주일 만에 끝내고 나니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어 긴 휴가 같은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심지어 원래 일주일에 이틀은 무조건 재택을 해야 하는 회사 규칙을 따라 이틀은 오피스조차 나가지 않으니 오후에 어느 정원에 앉아 햇빛을 쬐고 있다 보면 정말 휴가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내 경우에는 100%로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포지션은 아니어서 어디도 떠나지 못한 채 날씨마저 음울한 이 도시를 지키고 있긴 하지만 주변을 보면 바다로, 호수로, 산으로 떠나 좀 더 릴랙스 할 수 있는 곳에서 평화롭게 재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또, 여름에는 Summer Hour라는 제도가 있어 금요일에는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13시에 퇴근이 가능하다. 종종 내 매니저는 일이 끝났으면 오전 11시에도 퇴근해서 이 날을 누리라고 등을 떠민다.
이럴 때면 프랑스에서 일하는 게 좋긴 좋군-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회사가 인생의 중심이 될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공허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회사는 회사, 그리고 내 인생은 내 인생. 이것이 내가 받아들이고 있는 새로운 인생의 법칙이다. 누구도 그러라고 등 떠밀진 않았지만 내가 좋아하고 꿈꿔왔던 일을 한다는 이유로 지난 세월을 일에 과몰입한 채 살았고 일이 곧 내 정체성이라고 생각해왔던 만큼 이런 변화가 낯설긴 하다. 그게 내가 원하던 변화였다고 해도 뭐랄까, 막상 일과 나를 이렇게 분리하게 되니까 서운한 마음이 든달까? 사실은 내 세상에 가장 큰 부분이 (인정하려니 끔찍하지만) 일이었던 게 아닐까, 그걸 제외하니 별 다른 게 남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모두가 떠난 도시에 남는 일도 썩 유쾌하진 않다. 특히 올해는 알고 지내는 한국인 친구들도 방학을 맞아 한국으로 많이 돌아가 버려서 더욱 혼자 남겨진 느낌이 든다. 역시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상대적 박탈감. 일이라도 바쁘면 잡생각을 덜하겠지만 요즘엔 완전히 이 생각, 저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 머리가 가볍지도 않다. 게다가 날씨는 또 왜 이러는지, 예년에 비해 비가 너무 자주 오고 기온은 낮아서 아침은 16도로 으슬으슬할 정도고, 가장 더울 시간에도 23도를 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여름옷을 입을 일이 없고 늘 재킷이나 카디건을 챙겨 다녀야 하고 심지어 어제 퇴근길에는 얇은 패딩을 입은 사람도 봤을 정도다. 그러니 한 해를 여름을 위해 살 정도로 프랑스의 여름을 좋아하는 나는 계절도 잃고, 생기도 잃은 밋밋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아, 나의 지독한 8월 블루스.
일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는 나라에 살면서 매번 느끼지만 나에게 결국에 남는 건 근본적인 질문들이다. 내 인생에 일을 빼면 남는 게 뭐지? 앞으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주어진 과제다. 일로 인정받는 것 말고도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일 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것, 그러기에 더 잘하고 싶은 것을 찾아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고 싶다. 사실 그러려고 이 먼 곳까지 와서 공부도 하고 일도 하는 것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이번 주는 드디어 기온이 오르고 햇빛도 쨍쨍할 예정이다. 또 그럼 좀 괜찮아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