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서른에 새로운 세계를 마주한다는 것
부활절과 함께 프랑스의 봄방학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살고 있는 지역에 따라 A, B, C 세 개의 존으로 나뉘어 다 다른 기간에 방학을 맞게 되는데 파리는 Zone C에 속해있고 몽펠리에, 툴루즈 등의 도시와 함께 4월 20일부터 5월 6일까지 봄방학에 돌입한다. 내가 다니고 있는 국공립 어학원 역시 5월 1일까지 방학 기간을 갖는다. 어느덧 4월 말.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서 어학원에서 현재까지 3번의 중간시험을 쳤으며 방학이 끝나면 기말고사를 보고, 5월 말이면 종강을 맞는다. 그리고 6월 초에는 DELF B2 시험에 도전할 생각이다.
유학을 와서 다시금 공부를 시작하면서 깨닫게 된 사실은 인생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일이 나에게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이다. 앞선 글에서도 여러 번 말했듯, B2 반은 프랑스어 공부를 몇 년이나 쉬었던 내가 처음 들어가기에 조금 무리가 있던 수준이었고 실제로 공부를 하며 여러 번 좌절을 겪고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안주하지 않고 실력을 쌓을 수 있었다. 세 번의 시험을 치는 동안, 듣기 읽기 쓰기 모든 분야에서 성적이 올랐기 때문이다. 제발 반만 맞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첫 번째 시험에서는 세 분야 모두 나란히 반을 간신히 넘긴 5.5점씩을 받았는데 듣기는 두 번째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고 읽기는 5.5->7->8점으로 점차 성장했으며 쓰기는 5.5->6->9점을 기록하며 마담의 bravo!라는 코멘트를 받았다. 유일하게 문법만 중상 정도의 수준에서 놀라울 정도로 고만고만한 성적을 기록하며 평행선을 유지 중인데 방학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기말 시험에는 꼭 유의미한 수준으로 올려놔야겠다. 아무튼 이렇게 계단식으로 성적을 착실히 올리고 있는 덕분에 매 시험마다 마담의 칭찬을 받고 있으며 그게 나에게 엄청난 성취감을 준다. 나이를 먹으며 공부든 일이든 하는 만큼 보답을 받는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걸 더 잘 알게 되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A를 넣으면 그대로 A가, 가끔은 A+도 나오는 지금이 너무 즐겁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 경험이 쌓이고 나이를 조금 더 먹은 후에 다시 제로베이스에서 공부를 시작하는 경험이 딱히 나쁜 것 같지 않다. 물론 가끔은 좀 더 일찍 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유학을 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랬으면 반대로 내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후회가 남았을지도 모른다. '바로 공부를 시작하지 않고, 이 일을 해봤으면 어땠을까?'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공부는 자신과의 외롭고도 지루한 싸움이고, 그렇기 때문에 오만 가지 잡생각과 불안을 낳는 것은 나이가 먹은 지금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지난 몇 년간 내가 하고 싶던 일에 실컷 매달려 봤으니 오히려 가뿐하게 뒤돌아보지 않고 학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된 상태다. 마치 옛 연인에게 모든 것을 다 쏟아부어서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은 상태와 비슷하달까? (실제 연애관계에서는 미련 덩어리 스타일이지만.) 이는 동시에 벼랑 끝에 서 있는 심정과도 비슷하다. 이 길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간절함이 생겼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과를 내야 한다는 그런 간절함. 확실히 예전과 다르게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을 통해 좀 더 스스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그로 인해 호불호를 명확히 구분할 줄 알고 앞으로 택할 것과 버릴 것을 분류할 줄 아는 능력이 생긴 것이 플러스 요인이 된다. 어릴 때는 A나 B나 C 중 되는 대로라고 생각하고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겼다면, 지금은 A여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치열하게 맞서게 되었다는 거다. 그리고 일단 무엇보다 내가 다시 공부를 한다면 프랑스어일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프랑스어를 좋아했는데, 언어 공부를 좋아하는 나의 자아는 세월의 흐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그런 이유로 단순히 프랑스어를 좀 더 잘 쓰게 되었다는 사실이 내게 순수한 기쁨이 되어 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혹시나 나이 때문에 새로운 도전 앞에 망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할 뿐, 다른 건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 마음은 어디서 뚝 떨어진 게 아니고 그간 당신이 견뎌왔던 세월이 낳아온 마음일 테니까.
하나 더.
새로운 환경에 놓이고, 전에 만날 수 없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비전에 대해 듣다 보니 보는 세계가 넓어지고 그에 따라 도전 정신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 같은 반에 있는 친구들과 친해지다 보니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누게 되는데, 각자가 가진 꿈이 정말 다양하다.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와서 여기서 관련 분야 공부를 더 한 후에 파리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친구, 법대를 졸업하고 자신의 세부 분야에서 공부를 더 하러 온 친구, 대학에서 HR을 전공하고 인사팀에서 회사 생활을 하다가 심리학을 공부하러 온 친구, 외국에서 살면서 다른 문화에 대해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작가가 되고 싶은 친구 등 각자의 열정으로 뜨거운 친구들이 많다. 다 다른 나라, 다양한 환경에서 자라오다가 이곳에서 우연히 만난 것일 뿐인데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삶에 도전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서로에게 자극이 된다는 게 신기하다. 사실 내가 프랑스로 왔을 때는 부끄럽게도 어떤 인생의 방향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보다는 외국 생활에 대한 어떤 확신도 없었기 때문에 '일단 지내보고 생각하자!'라는 안일한 마음이 더 컸다. 그래서 학기 초에 친구들이 물어봤을 때도 아직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고 얘기하곤 했는데 한 학기를 보내면서 좋은 동료들의 영향으로 나 역시도 구체적인 꿈과 목표를 갖게 되는 중이다. 무엇보다 프랑스에 적응을 하면 할수록 여기서 계속 살고 싶은 마음, 아니 적어도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기 때문에 공부를 계속하다가 해외 취업을 노릴 생각이다. 이렇게 여전히 새로운 꿈과 목표가 생기고 또 도전할 수 있는 여지가 남은 지금 이 순간이 좋다. 그것이 요즘 나의 원론적인 행복이자, 삶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