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 시험과 보부아르

그리고 삶의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by 봄의파랑

학기가 끝난 후 이틀에 걸쳐 기말고사를 봤다. 방식은 DELF와 비슷했다. 첫날에는 세 시간 동안 듣기와 읽기, 쓰기 시험을 봤고 둘째 날에는 10분 정도 말하기 시험을 봤다. 말하기 시험은 우리가 학기 내내 배웠던 문학과 비문학을 넘나드는 텍스트 10개 중에 하나를 뽑아 그 텍스트에 대해 설명하고 그것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밝히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리고 중간중간 시험관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 당연히 어떤 텍스트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전부 다 공부를 해야 했고, 내가 선호하는 텍스트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엄청 긴장한 상태에서 문제가 적혀있는 종이를 뽑았는데 기쁘게도 내가 가장 좋아했고 동시에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던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의 자서전(Mémoire d’une jeune fille rangée)을 고르게 되었다.

룩셈부르크 공원에서의 평화로운 오후.

사실 이곳에서 보부아르에 대한 수업을 듣기 전에는 작가의 이름 정도만 들어본 상태였고 그 밖에는 아는 게 전혀 없었다. 그래서 마담이 20세기에 와서야(수업시간에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의 문학 작품을 읽었다) 드디어 여성 작가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고 했을 때 내심 놀랐다. 그녀가 여성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인지 몰랐던 것은 물론이고 애초에 여성 작가라는 것도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에 읽었던 그녀의 자서전 일부에는 대학생으로서 학기가 시작하는 첫날의 일상이 담겨 있었다.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 전식부터 후식까지 이어지는 엄격한 식사 시간을 지켜야 했던 그녀가 점심시간에 가족 식사에 참여하기 위해 집에 가는 대신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느끼는 해방감을 묘사한 부분은 정말 흥미로웠다. 점심시간에 집에 가지 않고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이 엄청난 진보였다니. 그리고 점심을 먹은 후에 그녀는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한다. 상대성 이론을 배운다고 언급하며 그것에 매력을 느낀다고 얘기하는 부분에서는 공부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느껴졌다. 공부를 하는 것 자체가 자유를 실현하는 방식이었다니, 21세기에 태어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공부를 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한편, 도서관이 닫을 시간 즈음에 관리인이 ‘무슈(원문에서는 복수형으로 표현), 이제 닫을 시간입니다’라고 말을 하는 부분에는 그 당시의 남녀차별을 엿볼 수 있었다. 마치 도서관에 여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도 없다는 듯한 대사이지 않은가? 나에게는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여성들의 제한적인 일상을 마주하는 일은 다소 쓸쓸하다. 그런 의미에서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 주어진 삶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만의 인생을 개척해 나간 보부아르의 용기에 절로 존경스러운 마음이 피어났다. 그게 내가 이 텍스트를 읽고 감명을 받았던 이유다. 같은 여성으로서 동시대에, 혹은 후대에 이 정도로 대단한 영향력을 끼치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쉽게, 되는 대로 살아가는 대신 나에게 주어진 인생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책임감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마땅하지 않을까.

말하기 시험에서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었다. 그래서 너는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어떤 삶을 꿈꾸냐고. 시험의 특성상 답을 미리 준비할 순 없으므로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답이 이어졌다. 공부를 계속해서 누군가의 좋은 롤모델이 되고 싶다고. 그 답을 마지막으로 시험장을 나왔고, 그 이후 나도 몰랐던 나의 인생 계획(?)에 대해 찬찬히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사실 누군가의 롤모델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고 한 번도 그렇게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싶은 것은 마음이 드는 것은 분명하다. 유학을 오고 계속해서 글을 쓰는 이유도 그렇다.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싶은 마음을 전달하는 방식을 글로 정한 것뿐, 그렇게 생각해보면 저 말이 아예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싶다. 물론 현재의 내 인생이 온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미완성마저도 누군가에게 영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 동기 부여를 하면서 계속해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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