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라는 나이

스스로를 믿어봐도 될 때다.

by 봄의파랑

때로 브런치 유입 통계를 확인하곤 하는데, 그 중 눈에 띄는 검색어가 있었다. 바로 '서른'. 결혼이든, 취업이든, 이직이든 인생의 특정 시기에 일정한 성과를 이뤄야 하는 우리 사회를 돌이켜보면 나이에 대한 압박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사회가 정해놓은 코스를 따라가고 싶지 않을 때, 그에 거부감이 들기 시작할 때, 궤도를 이탈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따라오는 불안감은 나한테도 찾아왔으니까.

나이 서른을 앞두고 인생이 그저 그런 상태로 끝날까봐 겁이 났다. 회사 생활을 통해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지쳐있기도 했지만 가장 큰 두려움은 인생에 별 만족을 느끼지 못한 상태로 안주하는 것이었다. 내 세상을 통째로 뒤엎는 것보다 그게 더 두려웠다. 스물 아홉, 지금 이 순간 (반쯤 미친채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다음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회가 찾아왔을 때 잡아야 했다. 물론 변화가 두렵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게 맞는 건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다. 적당한 연봉, 익숙해진 업무, 안정되어가는 일상,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살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미지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다. 어쩌면 내가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세상이 내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파리의 지붕을 좋아한다.

그래서 서른이 되던 해 프랑스로 유학을 왔고, 내 나이는 다시 스물 아홉이 되었다. 스물 아홉을 두 번이나 살 수 있으니 나이라는 건 정말 무의미하지 않은가. 어디에선 스물이 되고 어디에선 서른이 되는데 그 차이가 뭐가 의미가 있냐는 말이다. 우리에겐 각자의 삶이 있고, 그 삶의 속도가 타인과 다르다는 이유로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남이야 그러든 말든. 한 가지 기준으로 타인의 삶을 재단하기에는 이미 인구 수 만큼의 서로 다른 삶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생이 갑자기 바뀌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에 유학을 온 걸 수도 있지만, 나는 내가 그동안 잊고 살았던 많은 가능성을 다시 마주할 수 있어 기쁘다.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용기를 내볼 수 있어서, 더 나은 내가 되지 않을까 기대할 수 있어서 좋다. 혹여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해도, 빨간 색이었던 내가 파란 색인 세계를 만나 보라빛으로 물들어 가는 이 순간들이 값지다. 나는 종종 슬프고 가끔 무너지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어쩐지 이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특권인 것 같아 그럭저럭 지낼 만하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건 내가 서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노을이 그림 같았던 센 강의 저녁.

그러니까 서른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어떻게 하면 스스로를 잘 위로할 수 있을지 알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따져보면 서른은 꽤 좋은 나이다. 내 체형을 더 잘 알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옷이 잘 어울릴지 알고(더 이상 보기에 예쁘다는 이유로 덥석 구매하지 않게 되었다!), 또 어떤 취향도 생겨난다. 이십대의 자잘한 실패와 시행착오의 결과로 얻은 성과다. 그러니까 서른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스스로를 위한 더 나은 결정을 할 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용기를 필요로 하는 선택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대부분의 경우, 당신이 생각한 바가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당신을 더 좋은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도 믿어도 좋다. 정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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