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지나간다, 그리고 생각보다 괜찮다.
이번 주 우리 반에는 린지라는 새로운 캐나다 여학생이 왔다. 또래 여학생은 실로 오랜만이라 꽤 들떴었다. 쉬는 시간에 얘기를 나누던 중, 그녀와 내가 같은 나이라는 것과 그녀가 P&G 마케팅 부서에서 6년을 일하다가 지금은 일을 그만두고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는 같은 나이에 직장 경력이 있으며 지금은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급격히 가까워졌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30대 중반의 여 선생님은 웃으며 '그게 30대의 위기 아닐까? 나도 31살 때 3년 간 하던 일을 그만두고 인도로 여행을 갔거든'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참 신기하지 않은가?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나고 자라도 서른 언저리의 여자로서 어떤 공통된 맥락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누구에게나 잠깐 멈춰서 호흡을 고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유별난 게 아니라는 것이 생각보다 큰 위안을 주었다.
요 몇 주는 학원과 도서관, 집을 오가며 열심히 공부를 했다. 학원이 끝나고 집에 가고 싶은 순간에도 스스로를 달래 가며 도서관에 가며 공부하는 습관을 붙이기 시작한 것이 꽤나 효과가 있었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 집에 가면 만신창이가 돼버려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지만, 뭔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뿌듯함에 정신적으로는 건강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한동안 공부에 슬럼프가 오기도 했고 대학원이 다 무슨 소용이냐 싶기도 했지만 다시 마음을 잡게 된 건, 존경하던 교수님께 보낸 메일 한 통 덕분이다. 추천서를 부탁드리려고 조심스럽게 메일을 보냈는데, 답장으로 온 '소식 듣게 되어 반갑다. 인생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렸구나'라는 단 두 줄에 꼭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고, 그게 커다란 동기부여가 되었다. 아무튼 그렇게 '습관적으로' 공부를 하는 날이 쌓여갈수록 확실히 불안하거나 초조하지 않아졌고, 나를 오랫동안 괴롭히던 '만약 원하는 대학원을 못 간다면,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공부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라는 질문에도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지금 나의 이런 노력이 당장에 어떤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장기적으로는 인생에 다양한 선택지를 부여할 것임을 약간은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부하면 어떻게든 너한테 남을 거야. 공부한 게 어디 가겠니?'라는 친구의 말을 비로소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공부를 하는 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가는 일이라는 사실이 날 즐겁게 한다.
파리의 가을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다. 나는 이 도시에서 가을을 누릴 수 있다는 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가끔은 꿈결을 걷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내가 느끼기에 파리는 우리나라보다 여름이 짧고 가을이 일찍 시작한다. 그리고 '가을'이라고 부를 만한 날씨와 분위기가 꽤 오래 지속된다. 9월이 좀 더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에 코끝에는 선선한 바람이 스치고 나뭇잎이 다채로운 색깔을 띠는 이상적인 가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9월이 끝나고 10월에 접어들면서는 확연히 공기가 차가워지고 구름이 끼는 흐린 날씨에 비도 자주 오는 편이다. 조금 더 우울하고 우중충한 가을의 모습이랄까. 이제는 아침, 저녁으로 입김도 나올 정도로 쌀쌀해졌고 해가 짧아지면서 하루도 일찍 마무리된다. 아무튼, 코 끝에 겨울이고 여전히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