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을 떠나보내는 일이 이렇게 슬프다니

4년을 함께 한 노트북에 안녕을 고했다.

by 봄의파랑

언제나 새 것을 좋아했다. 새 옷, 새 노트, 새 연필, 새 핸드폰. 돈을 벌어 새로운 물건을 사는 건 회사 생활을 버티게 해 준 의미 있는 행위였다. 새로운 물건을 사고 나면 돈을 버는 이유를 찾았다는 착각을 했고, 그렇게 새로운 물건이 주는 신선함에 매료되며 반복적인 회사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 직장인의 유일한 낙을 뽑자면 그거였다.


짧은 휴가를 보내러 파리에서 한국으로 오는 길에 노트북이 망가졌다. 오랜만에 짐이 가득 찬 캐리어를 들고 낑낑대며 계단을 오르는데, 어깨에 맨 에코백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처음에는 비를 맞았나(그날 파리에는 세찬 비가 내렸다.) 했는데 5초 뒤, 집에서 나오기 직전에 챙겨 넣은 페트병에서 물이 쏟아졌음을 알아차렸다. 가방 안에서 병이 눌려버린 건지 뚜껑이 열렸고 약 100ml 정도 되는 물이 한 방울도 남지 않고 다 쏟아졌다. 그 에코백에는 노트북과 책이 들어 있었는데, 어이없게도 노트북 걱정을 한 게 아니라 책이 젖었는지를 먼저 확인했다. 사실 이때까지도 노트북의 상태에 대한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책은 하나도 젖지 않은 보송보송한 상태였고 서둘러 공항을 가기 위한 RER에 올랐다. 그렇게 입국 수속을 마치고 한 시간 비행을 거쳐 경유지인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고 작업을 하기 위해 노트북을 켰을 때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노트북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등에서부터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더 이상 켜지 않고 노트북을 말리려고 애쓰며 한국에 왔고, 며칠이 지난 후 노트북을 켜는 데는 성공했으나 역시 이미 망가져버린 후였다. 서비스센터로 찾아갔더니 고치는 것보다 새로 하나 사는 게 더 저렴하다며 그래도 이 정도면 오래 쓰셨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데 노트북을 새로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신나는 게 아니라 이렇게 갑작스러운 작별을 한다는 게 너무 서운했다. 어디 세상에 잘 준비한 이별이 있을 수 있을까 하면서도 어떤 이별이든 갑작스럽고 허무한 건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을 지던 순간, 판테옹 앞에서.

생각해보면 사적인 취향이 담긴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나의 맥북에어 11인치 2015년형은 거의 매일 들고 다니던 영혼의 동반자 같은 존재였다. 2015년 가을에 구입했으니 나의 첫 직장이었던 모 매거진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시기부터 직장을 그만두고 유학을 오기까지의 모든 여정을 함께 한 셈이다. 내 인생에 가장 큰 변화가 있었고 그만큼 가장 찬란하기도, 가장 아프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어떤 방향이든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시기를 함께 해왔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큰데 함께 한 물리적인 시간 자체도 긴 편이다. 언제 어디서든 맥북과 함께였고 특히 마감을 맞추기 위해 맥북을 옆구리에 낀 채 뛰어다니며 틈 날 때마다 카페, 촬영장, 스튜디오 어디든 자리를 잡고 앉아 원고를 썼던 일은 지금도 생생하다. 인터뷰 녹취를 풀 때는 회사 컴퓨터보다 더 편해 사무실에서도 책상 위에 맥북에어를 두고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미친 듯이 타이핑을 해 내려가기도 했다. 무엇보다 맥북에어 특유의 키보드 촉감을 사랑했다. 가끔은 단지 그 키보드 때문에 글이 잘 써진다고 느끼기도 했으니까. 어떤 물건은 한 사람의 한 시절을 오롯이 품고 있으며 그로 인한 애착은 이별을 어렵게 만든다. 나는 노트북을 바꿔야 했을 뿐인데 어쩐지 인생의 다음 페이지를 넘겨버린 것만 같은 착각이 들며 약간은 서글펐다.

뤽상부르 공원에서 책을 읽던 어느 오후.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가장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프랑스인들은 새로운 물건에 크게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역사가 있는 오래된 가구를 좋아하고, 특별함을 소비할 수 있는 빈티지 쇼핑을 좋아한다. 센 강을 따라 자리하고 있는 가판대에서는 손 때가 묻은 고서적을 팔고 파리 곳곳에서는 주말마다 플리마켓이 열린다. 우리 집 앞 공원에는 매주 주말 오래된 책을 파는 장이 열리는데, 매번 사람들로 북적일 정도다. 새로운 것보다는 자신의 취향이 담긴 물건이 더 가치가 있다고 믿고 그런 숨겨진 보물을 찾는 데 소중한 주말 시간을 보내며 낡은 모델의 스마트폰을 쓴다 해도 고장 난 게 아닌 이상은 굳이 그것을 바꾸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사회에 있다 보니 나 역시 자연스럽게 새 것에 대한 관심이 줄게 되었다. 이처럼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 새 물건은 금방 낡은 것이 되어버리고, 결국에는 다른 새로운 물건으로 잊히기 마련이다. 그리고 한번쯤은, 우리의 욕망을 조작하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지배되어 버린 게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소비에 쓰곤 했던 에너지를 인생의 즐거움을 찾는 데 할애하는 것, 그것대로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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