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이 날 슬프게 하지 않았으면 해
홀로 외로이 보내는 연말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있다. 한 해가 끝나간다는 것은 어쩐지 쓸쓸함을 주기 때문에 그 공허를 메우기 위해 늘 연말이 다가오면 함께 보낼 친구들을 찾았다. 모여 웃고 떠들다 보면 타인의 온기 덕인지 그 허전함은 유야무야 사라져 갔다. 내가 파리로 오기 전까지는 매해 제일 가까운 몇 명의 친구들과 마니또를 해서 일정 예산 이내의 선물과 편지를 주고받는 이벤트를 하기도 했다. 우리는 돌아가면서 서로가 쓴 편지를 읽어줬다. 매일 카카오톡으로 시답잖은 대화들을 나눈 통에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순간 읽어주는 편지 하나는 또 어쩜 그렇게 특별한지 들으면서 울컥하는 순간들도 많이 있었다. 서로를 보듬아주며, 그렇게 지친 마음을 기대기도 하면서 그래도 세상을 살아갈 힘을, 일상을 버텨낼 위안을 받아왔다.
세 자매가 있는 가족의 삶이라는 건 또 어떠한가. 그건 잠시도 심심할 틈이 없다는 뜻이다. 다섯 식구가 늘 함께 살았던 덕에 집은 늘 북적북적했고 엄마 아빠가 매년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날 때, 남겨진 우리 셋은 별 거 없지만 편안하고 즐거운 연휴를 누렸다. 쓸데없이 열을 올리며 카드 게임을 한다든지, 모여 앉아 하이틴 영화를 보며 호들갑을 떤다든지, 집 식탁에 둘러앉아 와인을 마시며 수다를 떤다든지, 아니면 하릴없이 빈둥거리며 텔레비전 채널을 돌려가며 별 의미도 없는 시상식을 본다든지 하는, 정말 그때는 시시하고 지루하다고 여겼던 모든 일들이 이제와 생각하면 잠시라도 울적한 틈을 남기지 않았던 이유가 되어주었다.
원래 모든 건 있다 없으면 그 빈자리가 더 큰 법이라 학기가 끝나가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할 즈음부터 나의 걱정은 유난스럽게 연말로 향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덕에 어디로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어려워졌고 알고 지내던 친구들은 하나둘 가족들과 연말을 함께 보내기 위해 도시를 떠났다. 이곳에 남아 자리를 지키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라는 사실이 나를 집어삼켰다. 도무지 도망갈 데라고는 없는 코너에 몰린 기분이었고 시험이 하나둘 끝나갈수록 초조했다. 정말 이대로 가만히 이곳에서 새해를 맞는다고?
정말 그대로 크리스마스가 지났고 어느덧 2020년도 며칠 남지 않았으며, 다음 주면 개강이다. 막상 시험이 끝나니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매일 같이 비가 와서 어디 밖으로 나가기도 귀찮아진 나머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집에서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청소를 했다. 이사 온 그대로 박스 채 방구석에 처박혀 있었던 겨울 옷도 차곡차곡 정리해 옷장 안에 넣어놨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우울감을 떨치기 위해 알고 지낸 지 오래된 친구와 별 다른 목적지 없이 파리를 걸었다. 이런 어지러운 세상에서도 크리스마스는 여전히 다정했고 어쩐지 그 사실만큼은 위로가 되었다. 트리를 감싸고 있는 각종 전구들이 반짝반짝 시청 앞을 밝혔고 길게 줄이 늘어선 회전목마는 사람들을 태우고 빙빙 돌기를 반복했다. 한 청년은 크고 작은 비눗방울을 끊임없이 만들어냈고 아이들을 그 주위를 뛰어다니기 바빴다. 근처에 있던 어른들마저 마법에 홀린 듯 그 장면을 한참 쳐다보다 급기야는 손으로 비눗방울들을 톡톡 건드리기까지 했다. 온통 비현실적이고 아름다웠던 세계는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은 빛으로 찬란한 거리를 뒤로 하고 하나둘 사라져 갔고 이제는 모두가 집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엔 나도 발걸음을 서둘러 집으로 왔다.
한국도 코로나가 심해진 탓에 연휴 내내 집에만 있게 된 가족, 친구들과 영상 통화를 하며 연말 기분을 내기도 했다. 요즘에는 정말 기술의 발달로 영상 화질도, 음질도 다 깔끔해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여기가 서울인지 파리인지 아니면 우리가 자주 가던 한남동의 바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렇게 세 시간은 예사로 통화를 했고 친구들의 저녁 시차에 맞추다 보니 낮부터 와인을 마셔서인지 통화를 끝내고도 그 알딸딸한 행복감에 한참을 취해있곤 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나눌 수 있는 마음의 크기는 여전하다. 친구들은 그대로고 우리의 대화는 늘 그랬던 것처럼 영감으로 가득 차 있다. 많은 것이 변하는 와중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날 꾸준히 안심시킨다. 새로운 것에 대한 자극은 덜하지만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것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다는 건 나이를 먹어서 좋은 이유 중 하나.
이제 인정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당연히 외로운 거라고. 그리고 그 사실을 조금 늦게 알게 되었다는 것 자체도 행운이었다는 걸 말이다. 내게 남은 건 그 외로움을 좀 덜 슬피 여길 수 있는 마음. 혼자 감당해야 하는 감정이 많아졌다는 사실에 너무 기운 빼지 않기로 한다. 오히려 단단하게 밟아놓은 토양에서 더 아름다운 꽃이 필지도 모르잖아. Bonne Anné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