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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래동 키키팬 Nov 04. 2020

04. 나는 '캣맘'이 싫어요

나는 캣맘이 싫다. 길고양이를 보살피는 따뜻한 사람들이 아니라, '캣맘'이란 단어 자체가 싫다.


이러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는 어쩔 수 없이 젠더 관점이 들어올 수밖에 없다. 나는 길고양이의 문제를 젠더라는 단순한 이분법의 정치를 넘어서 바라보고 싶다. '캣맘'은 그 연대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해 버리는 높은 장벽 같은 단어다.


'캣맘'이란 단어가 가진 부정적 의미는 두 가지다. 하나는 '맘충'으로 대표되는, 사회에서 몰상식하게 치부되는 '맘'이라는 추상의 집단. 그리고 동네를 소란하게 하는 골칫덩어리인 길고양이의 '캣'이 더해진 경멸 조의 이중 중첩. 굳이 가만히 놔두면 될 길고양이들을 깨시민처럼 착한 척한답시고, 먹여주고 재워주며 동네를 요란하게 하는 몰상식한 맘충 집단이라는 뜻이다.


나머지 다른 하나의 의미는, 어떤 존재를 배려하고 보살피는 따뜻한 '감정'의 행위의 가능성을 '맘'이라고 하는 '여성' 그리고 헌신적인 '어머니'의 집단의 차원에만 꽁꽁 가둬버리는 것. 그 위로 사회적으로 배려와 헌신이라는 돌봄 노동의 가치를 절하하고 은폐하려는 자본주의의 이념이 콘크리트처럼 공고하게 덮인다면 더욱 절망적이다. 이러한 이중의 콜라보가, 사회적으로 전혀 쓸모가 없는 심지어는 굳이 골칫거리를 만들어 내기까지 한다는 '캣맘'들에 대한 사회적 혐오의 시선을 무의식 중에 전파한다. 단어는 명백한 의식을 갖고, 우리의 무의식을 좌우한다.


콩이는 골판지 집을 맘에 들어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콩이의 보금자리에는 소박하게나마 골판지로 만들어진 작은 집이 있었다. 콩이는 덕분에 추위나 주변 차도에서 날리는 먼지로부터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골판지 집 안에는 사료와 물그릇, 그리고 편히 몸을 누일 수 있는 작은 담요가 놓였었다. 이는 단지 어느 한 명만의 노력이 아니었다. 콩이가 사는 문래동 아파트 주민들이 모두 한 손씩 거들어가며, 길고양이 콩이라는 하나의 작은 존재를 위한 작은 노력들을 쌓은 결과였다. 사료가 떨어지면 사료를 채워놓고, 물이 떨어지면 물을 다시 채워놓고. 서로가 말을 하지 않아도,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바통 터치를 하며 콩이를 위한 배려의 릴레이 달리기를 한 셈이다.

그런데 지금 그 자리에는 그 모든 것들이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없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골판지 집이 사라지고, 다음날은 작은 담요가 사라지고, 그다음 날은 사료와 물그릇이 사라지는 식이었다. 아마도 콩이를 보살피는 문래동 '캣맘'들을 아니꼽게 보는 시선을 가진 정체모를 이들이 관리실에 민원을 넣어 철거되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다. 지금 콩이에게 남은 건 차가운 벽돌 위에 올려진 사료 몇 줌과, 작은 물그릇 하나뿐이다. 그마저도 더러운 흙바닥 위에. 얼마 전 콩이가 추위에 떨며, 아파트 주차장에 선 택배차의 엔진기관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문래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는 작은 길고양이 한 마리를 사이에 두고, 두 세력 간의 소리 없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누군가에게 이 싸움은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존재를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그런 거대한 의미일지도 모른다.


피우던 담뱃불을 끄고, 잠시나마 콩이의 옆에 앉아 쭈뼛거리며 손을 내밀거나 쓰다듬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 많은 아빠들을 나는 문래동에서 보아 왔다. 적어도 내가 본 그 미소들은, 콩이를 향해 짓던 짧은 미소들은 그 순간만큼 진심이었다고 생각한다. '캣맘'이란 단어에는 이들이 함께 들어설 공간의 가능성이 결코 없다.


입에는 잘 달라붙지 않지만 (자주 쓰이다 보면 언젠가는 입에 달라붙을 지도) '캣맘'(또는 캣대디)을 넘어 ‘캣시스터' '캣엉클' 같은 연대의 가능성을 가진 수많은 단어들이 생겨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모든 집단의 단어들이 연대하고 하나로 모여, 따뜻한 온도를 가진 또 다른 무언가의 단어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이건 단지 길고양이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주변의 소외된 부차적 존재들을 향한 연대의 문제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가볍게 치부해버리는 '캣맘'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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