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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래동 키키팬 Nov 03. 2020

03. 고양이의 밤하늘은 언제나 가장 짙은 블루

철학자 레비나스는 사라져 버린 존재들의 심연, '일리아(il y a)' (~가 있다, 프랑스어)를 통해 '존재'를 서술한다. 그의 철학에 따르면, 일리아에서 불쑥 빠져나와 현전하기 이전까지의 모든 존재는 절대적으로 타자화된 '낯선 무언가'로 머물러 있다. 워낙 난해하기로 유명한 철학이라, 모든 존재가 불분명하게 뒤엉킨 어둠의 블랙홀, 혹은 빅뱅 같은 느낌 정도로 나는 이해했다.

고양이는 자신이 받은 모든 사랑을 흡수해 버리고야 마는 그런 일리아(il y a) 같다.

고양이는 심연의 존재다. 강아지가 인간이 자신에게 준 사랑을 모두 반사해 그 배로 돌려주는 존재라면, 고양이는 자신이 받은 모든 사랑을 흡수해 버리고야 마는 그런 일리아(il y a) 같은 존재다. 보통 사랑을 받으면 예의로나마 돌려줄 법도 한데, 고양이들에겐 그런 예법이 없다. 그들은 원래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 당연히 그것이 마땅한 존재로 태어난 것처럼 행동한다.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을 때 한없이 작아져 버리는 나는 그런 고양이가 부럽다.

콩이는 누가 와도 늘 거만하게 누워 있다. 그런 콩이 앞에서 나는 조급해진다.

콩이도 역시 '고양이'라는 자신의 종(種)을 속일 수는 없나 보다. 콩이는 문래동 사람들의 애간장을 들었다 놨다 할 줄 안다.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수거하고는, 적절한 교태의 몸짓과 울음소리란 아주 약간의 퍼포먼스로 보답하는 그런 천생 연예인 같은 존재. 살면서 강아지와 고양이 중 고양이를 보다 먼저 가까이하게 된 나로서는, 고양이를 향한 집착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 콩이 앞에서 나는 늘 '을'의 연애를 하게 된다.


상대방의 마음을 철저히 갖고 놀 것만 같은 그런 차가운 고양이들에게도 낯선 모습은 있다. 콩이는 가끔 아무리 불러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저기 멀리 밤하늘 어딘가를 가만히 아주 오랫동안 응시할 때가 있다. 나는 그런 콩이를 볼 때마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속 한 문장이 떠오른다.

"무사 태평하게 보이는 이들도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려 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끝을 모를 정도로 그 속이 심연처럼 깊어 보이기만 하던 콩이. 그에게서 나는 왠지 모를 슬픈 소리가 나에게 전해져 담기는 이 느낌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텅 빈 소리가 주는 그 슬픈 공간감을 다시 무언가로 채워주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콩이도 나처럼 그 속이 슬픔으로 텅 비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도 든다. 가끔 콩이가 밤하늘을 그리도 오랫동안 바라보는 이유를, 나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사람을 보면 사랑을 듬뿍 담아 품에 안기는 강아지와 달리, 고양이는 아무리 오래 알고 지내도 낯선 레비나스의 '타자'같은 존재다. 강아지가 샵(#)이라면, 고양이는 플랫(b)이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쭉 플랫의 톤으로 진행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언제나 가장 짙은 블루>. 고양이의 눈에 비친 밤하늘도 언제나 가장 짙은 블루일까. 콩이는 아무리 물어도 대답이 없고, 나는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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