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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래동 키키팬 Nov 03. 2020

02. 점쟁이 고양이의 복채는 통조림

최근 '퇴사'라는 내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데에 콩이가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콩이에게 점을 봤는데 퇴사라는 점괘가 나왔다. (이건 사실 비밀인데, 고양이들은 점을 볼 줄 안다) 유물론자인 나는 고양이의 점괘를 의외로 철석같이 믿는 편이다. 그런 배경에는 사실 나의 오랜 경험들이 숨어 있다. 콩이의 점괘를 설명하기 위해 조금은 긴 얘기를 시작한다.


나는 요즘 젊은 세대답지 않게 필름 사진을 찍는다. 롤랑 바르트는 필름 사진에 삶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암실에서 오랜 네거티브 현상 과정을 거쳐 태어나, 사람의 손에서 함께 늙어가는 그런 삶의 느낌 말이다. 취미로 사진을 찍는 나는 전문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휴대폰이나 디지털카메라로 찍는 사진들에는 그런 느낌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32장의 필름과는 달리, 언제든지 셔터 한 번이면 무한히 찍어낼 수 있다는 공산품의 느낌이랄까. 이러한 이유로 나는 필름 사진을 사랑한다. 말은 그럴 듯 하지만, 사실은 약간의 허세와 키치가 섞여 있다.


필름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것은 하나의 여행이다. 서른두 장이라는 필름의 한정된 분량은 나처럼 천성이 덜렁거리는 사람도 꼼꼼하게 만든다. 꼭 무언가 지금이 아니면 절대 안 될 것 같다는 그 순간만을 필름에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방구석 히키코모리인 나는 필름 카메라를 든 날이면, 도시의 구석 곳곳까지 샅샅이 파헤치는 그런 여행가가 되고야 만다.


도시의 구석 곳곳에는 고양이들이 숨어 있다. 당신이 미처 들여다보지 않는 그런 곳까지도 말이다.

도시의 구석 곳곳에는 고양이들이 숨어 있다. 당신이 미처 들여다보지 않는 그런 깊은 곳까지도 말이다. '고양이 액체설'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이론은 아니지만, 나는 귀납법으로 그것이 어느 정도 진실이구나를 느낀다. 그렇게 사진에 담고 싶어 돌아다녀도 한 장을 못 건지다가, 우연히 들여다본 구석에 꼭 한 마리씩 숨어 있다. 고양이는 정말이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 만약 슈뢰딩거의 취미가 필름 사진 찍기였다면, 그의 가설이 태어난 시기가 조금은 앞당겨지지 않았을까.


필름 사진을 찍기 시작한 초반에는 꼭 계획된 동선으로만 다녔다. 그런데 도시의 고양이들을 찍기 시작하며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고양이를 사진에 담는 것은, 썸을 타며 밀당하는 커플의 카톡처럼 정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일이다. 고양이들과의 거리는 딱 다섯 발자국이 적당하다. 그 이상을 넘어가면 그들은 언제나 겁을 느끼며 도망가 버린다. 나는 도망가는 고양이들을 뒤쫓아 가며, 집을 나설 때 세웠던 동선을 늘 수정하게 되었다. 고양이는 Serendipity(뜻밖의, 의도하지 않은 발견)의 존재다.


그런데 나의 바뀐 앞길들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고양이들을 뒤쫓던 나는 그날 너무나 만족할 만한 사진들을 건질 수 있었다. 염리동 소금길이란 곳도 알게 되었다. 엄청나게 발이 빠른 갈색 줄무니의 고양이를 쫓던 날은, 아주 바삭바삭한 돈가스 맛집을 발견하기도 했다. 점차 나는 고양이에게 내 인생의 일부를 맡겨도 그리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들이 내 마음속에 켜켜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쌓이고 또 쌓였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앞길이 막막할 때, 사람들은 보통 머리보다는 가슴을 따르라는 조언을 하곤 한다. 나는 가슴보다 당신의 동네에 사는 고양이 한 마리의 점괘를 한 번 믿어보라는 말을 남기고 싶다. 어차피 인생의 갈림길 앞에서 당신은 가슴을 뛰게 만드는 그런 길을 이미 정해두고 있지 않은가. 당신은 다만 새로운 도전이 두려울 뿐이다. 고양이의 점괘는 그런 당신의 마음속을 빤히 들여다 보고는 귀신 같이 알아맞힐 것이다.


나는 사실 모 일간지 언론사에서 기자로 잠시 일했다. 기자는 글쓰기와 책 읽기를 좋아하는, 그런 아주 작은 그릇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수습기자가 되어 경찰서를 돌면서, 감정이 담기지 않은 말은 그렇게 차가울 수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차라리 다들 화라도 내주면 좋았을 텐데. 하루는 어느 때처럼 말도 못 붙이고 가만히 앉아 있는 내게 경감님들이 말을 걸었다. 대뜸 아들 같으니 손금을 봐주겠다고 하셨다. "너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진 않겠지만, 너를 정말 진심으로 아껴주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을 팔자다." 세상을 돌다 보면 자기들처럼 너를 따뜻하게 받아주는 사람들이 꼭 있을 거란다. 그러니 아무리 힘들어도 꾹 참고 버티라고 했다. 지구대를 나와 주저앉고는 한참을 울었다. 울고 또 울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일을 정말이지 잘 해낼 자신이 없다는 생각. 그리고 다음날 나는 사표를 썼다.


얘기는 멀리 돌고 돌아 다시 콩이와 나의 얘기로 돌아온다.

점쟁이 콩이는 내 점괘를 봐주고는 그렇게 무심하게 뒤돌아 떠났다.

사표를 결심한 바로 그날, 동기들 그리고 선배들과 회식 자리가 있었다. 문래동 집에 돌아오는 길, 조금 알딸딸한 나는 여느 때처럼 콩이 앞에 앉았다. 이미 사표를 쓰기로 결심은 했지만 너무 두려웠다. 맞는 걸까, 틀린 걸까 하는 생각들이 머리를 맴돌았다. 점쟁이 콩이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 퇴사할까? 너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왼발, 아니라면 오른발을 내밀어줘." 콩이는 손을 내민 나를 한동안 뻔히 쳐다봤다. 그리고는 잠시 고민하더니 왼발을 내밀었다. 나는 콩이가 내게 발을 내미는 그 순간을 아직도 슬로비디오처럼 기억한다. 작은 깃털이 내 몸에 닿는 그런 느낌, 부드럽고 편안했다.


나는 그날 밤 콩이 앞에서 한참을 울었다.


다음날 현관 앞에 콩이가 보이지 않았다. 엄청난 점괘로 내 속을 그렇게 흔들어 놓고는, 사라져 버린 녀석. 복채를 뭘로 줘야 할지 몰라, 기름기가 가장 적은 마일드 참치로 골라 현관문 앞에 두고 출근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 흘낏 본 참치캔이 텅 비어있었다. 점쟁이 고양이는 복채로 준 통조림을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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