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소재 명문대생의 가면(INFJ)

by 아론

정신과에서 희귀 난치진단을 받은 지 2년여의 시간이 지났다.

희귀 난치 진단을 받은 건 첫 직장에서의 퇴사 이후 4년간 사귀던 남자친구와의 이별, 그리고 한 새로운 연애에서의 이별, 방송국 면접의 낙방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4년제 서울의 상위권 대학 옛말로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나는 크리스천이고 25살 때 세례를 받은 세례교인이며 그 이전에도 교회를 다녔고 지금도 대한예수교장로회 교회를 섬기고 있다.


나는 파란만장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세 자매 중 장녀로 어린 시절은 가난하다가 부자였다가 롤러코스터와 같았다 부천의 반지하에서 네 가족이 살기도 했고 막내가 태어날 땐 벽제의 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아빠는 자영업자셨는데 사업이 잘되어 드라마 배경지로도 나오는 사업을 하셨고 나는 사교육도 네다섯 개씩 수영, 피아노, 글쓰기, 바둑 등등 공부를 배웠다.

그러다가 서울로 아빠 사무실도 옮기고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이사 오게 된다.

60평 빌라에서 전세로 살다가 다락방이 딸린 2층집 전세로 이사가게되었는데 그날 엄마는 많이 울었다 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였다.

하이튼 엄마의 눈물 뒤로 우리 집에는 고난이 찾아왔다 엄마아빠는 기독교신자는 그 당시 아니셨다. 그냥 평범한 부모님이셨다. 티브이 보는 것 좋아하고 아빠는 주말에 아이들과 놀아주시는.. 그때는 도자기 만들기 체험도 가고 인라인 스케이트도 타고 아빠랑 그렇게 추억을 쌓았었다.


어린 시절 교회에 간다고 하면 엄마아빠는 우리를 교회에 바래다주셨다. 나는 유치부였는데 달란트 시장도 재미있고 주의 자비가 내려와 찬양이 너무 좋았다.


그때 나는 꿈을 꿨다. 나얼의 바람기억 뮤직비디오처럼 귀신같은 것들이 달라붙어 우리 집을 풍비박산 만드는 것이었다.

그 뒤로 우리 집에 우환이 찾아왔다.

엄마는 암에 걸렸고 아빠는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아빠는 민속주 유통업 자영업을 했는데 막걸리를 판매하셨다. 그 과정에서 술집여자와 바람이 난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아빠의 핸드폰 폴더폰 문자들을 보다가 아빠가 상간녀와 나눈 문자를 보았다. 사랑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때 11살이었다. 아빠는 그 무렵 집에 들어오는 일이 적었다 사업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 문자를 보고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는 좀처럼 알지 못했다 엄마에게도 말을 못 했다. 아빠가 퇴근하면 늘 세 자매가 달려와 안아줬는데.. 그러지 않아서 언제부터인가 달려와 안아주지 않아서 아빠가 그런 일을 하게 된 걸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많이 후회된다. 다시 돌아가면 아빠를 잃지 않게 그 상간녀가 다가오지 못하게 퇴근한 아빠를 꼭 껴안아주고 싶다. 세 자매 모두 힘을 합해서.


엄마는 말기암 진단을 받았고 아빠랑 이혼을 했다.

이때의 나는 인생은 아름다워 아빠주인공처럼 이 상황에서도 명랑하게 지냈다. 엄마가 이혼해주지 않으려 마지막까지 버텼는데 아빠가 양육비를 주지 않자 기초생활수급자로 복지혜택이라도 받고 싶어서 이혼하게 되었다. 엄마 아빠가 이혼한 그때 내 나이 11살이었다.


나는 동생을 꼭 끌어안고 엄마아빠의 이별순간을 봤다 방문틈사이로 두 분 대화를 들었고 동생이 하염없이 울었다. 나는 동생이 껴안고 있는 채 버티면서 잠자리에 함께 울었다.


엄마는 시한부 3개월 선고를 받았으나 내 나이 16살 때까지 사시고 돌아가셨다. 나는 3월 3일이면 세 자매날을 만들어 재롱잔치를 보여드리기도 했다 당시에 외가 가족들끼리 모여서 지냈는데 외할머니도 말기암이셨다 조카가 없는 이모가 우리 세 자매를 데리고 드라이브시켜 주거나 같이 여행도가 주고 이모는 할머니랑 엄마 항암치료를 다 따라다녔다.


나는 13살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졸업했다. 그런데 가혹하게도 14살에 바로 막냇동생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해야 했다. 엄마는 강북삼성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암말기 환자였기 때문에 외출이 가능한 나한테 크리스마스이브날 급하게 부탁했었다. 나는 그때 교보광화문 문고에서 막내 크리스마스선물을 샀다. 그렇게 큰 서점은 처음이었다. 아이의 동심은 지켜줘야 한다는 게 엄마의 부탁이었다. 우리 집이 잘 살 때는 크리스마스 아침 트리밑의 선물을 열어보며 재잘대는 자매의 모습에 아빠랑 엄마는 흐뭇했다고 했는데.. 나는 철들 기미 없이 동심을 지켜주는 수호천사 역할을 해야 했다.


나는 16살까지 매일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하나님 아침에 우리 엄마 가슴팍에 귀를 댈 때 가슴이 콩닥콩닥 뛰게 해 주세요 자고 일어났을 때 우리 엄마가 숨 쉬고 계시게 해 주세요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가 숨을 쉬고 계신지 가슴은 뛰고 있는지 엄마를 껴안는 척 먼저 확인했다.

세상엔 가난하고 힘든 아이들이 많아서 그 아이들을 다 돌보시기에 예수님이 너무 바쁘실 것 같아서 작고 하찮은 나의 기도가 예수님께 닿을까 그렇게 기도를 드렸지만 그 순간마다 하얀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은 3개월 시한부를 5년 버딘엄마의 모성애도 대단하다고 했다. 그 무렵 나는 아침 7시 청소년 주일예배를 드리러 강북삼성병원에서 동네교회까지 길을 나서곤 했다. 토이의 음악을 좋아하고 라디오를 좋아하던 16살 소녀로 자란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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