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화분과 살아난 집
난 손재주가 없다.
식물을 키우는 일은 더 자신이 없다.
“이건 진짜 손 안 타요. 물만 가끔 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건네받은 화분들도,
우리 집에 오면 이상하게 시름시름 앓다가
어느 날 말라버렸다.
물 주는 날을 달력에 표시하고,
햇살도 바람도 때맞춰 쐬어줬건만
애들은 나를 자꾸만 멀리했다.
꽃나무를 새로 들였다.
이름도, 키우는 법도 모르면서
그냥 예뻐 보여서, 그냥 샀다.
배송 온 박스를 보며 식구들이 한 마디씩 한다.
“어쩌려고 또…?”
나는 큰소리를 쳤다.
“이번엔 잘 키울 거야!”
솔직히,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예쁘게 키워보고 싶었다.
해보다 보면, 나아지겠지.
화분을 갈고, 물을 주고, 비타민도 꽂아줬다.
햇빛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아주고
하루하루 바라봤다.
그들을 멍하니 보는 날들이 길어졌다.
부동산 시장이 너무 조용해서 힘든 하루들이었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상을 바라던 날들이었다.
그 당연한 것들에 대한 감사함이 얼마나 컸던지.
역전세, 대출, 세금으로 너덜 해진 채
겨우 삶을 붙잡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집의 시들어가던 나무 하나가 다시 잎을 틔웠다.
연둣빛 작은 새순이,
꼬물꼬물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그 새싹을 응원하고 있었다.
새싹이 살아나야 내가 사는 것처럼.
“잘 버텨줘서 고마워.”
죽어가는 나무를 붙들고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물을 주고, 영양제를 듬뿍주고,흙을보충하고,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잎 하나 떨어질 때마다 마음도 같이 떨어졌다.
그러다 다시 새 잎이 하나 나오면
나도 함께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살아난 화분처럼,
이 집도, 나도, 다시 조금씩 살아났다.
이 집으로 이사 온 후
창밖으로 눈 내리는 걸 처음 보던 날이 생각났다.
나는 그 장면을 오랫동안 바라봤었다.
창가에 놓인 식탁에서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고, 이렇게 무언가를 끄적이곤 했었다.
그 시간이 이 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들,
조용한 저층의 평온함.
나는 지금, 숲 속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 속에 살았다.
그 착각을 놓고 싶지않았다.
사람들은 말했다.
“그래도 새 아파트로 가야지.”
“입지 좀 더 좋은 데 사야 나중에 오르지.”
나도 안다.
그런 말이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내 삶의 리듬에 맞는 집을 택했다.
팔기 좋은 집이 아니라, 살기 좋은 집을.
아이 셋, 맞벌이, 짐 많은 우리 가족에게
가장 절실했던 건 숫자가 아닌, 숨 쉴 공간이었다.
새 집은 못 사도, 새로운 일상은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집도 나를 닮아갔다.
초겨울의 바람도,
햇살 좋은 창가도,
밤늦은 식탁의 고요도.
모든 것이 지금 이 집 안에서의 나를 품고 있다.
집은 결국
삶을 지키는 가장 단단한 자유였다.
낡았든, 숫자로는 의미 없어 보이든,
그저 나를 품어준 그 공간은
조용히 나를 살아가게 했다.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된다.
이 집이 ‘우리의 이름’을 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자유로웠다는 걸.
식탁 옆으로 들이치는 한 줄기 햇살,
다시 살아난 새순 하나가
소리 없이 말해주었다.
삶이 풍경이 된다고.
평안한 풍경에 감사하라고.
아무 일도 없는 하루가,
사실은 가장 큰 선물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렇게, 조용한 빛과 바람 사이에서
나는 또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오늘도 그 살아 있음에
마음을 내려놓는다.
잎이 돋고,
바람이 불고,
다시 겨울이 와도,
나는 이 집 안에서 무너지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