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중순 일요일 저녁, 을지로는 한산했다.
네이버 지도에 '을지정육'을 치고 후미진 골목을 걸었다. 일정을 맞추지 못해 두어 번 미룬 후 겨우 잡힌 동행들과의 첫 만남이었다. 이름도 모른 채 카톡 아이디로만 대화를 주고받고,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사물을 파악하듯 몇 줄의 글로만 짐작했던 인물들을 드디어 만나는 것이다.
식당에 도착하니 이미 몇 명은 도착해 있었다. 인사를 건네며 조심스레 눈동자를 움직여 인원들을 스캔했다. 카톡 프로필을 이따금 들춰봐서 생김새가 낯설진 않았다. 잠시 후 모든 인원이 도착했고 소개팅 자리처럼 어색한 질문을 주고받으며 만남이 시작됐다.
내 시선은 벽에 붙은 오래된 사인과 불투명한 거울을 향했고 귀는 옆 테이블의 고기 지글거리는 소리 쪽으로 기울었다. 이따금 곁눈질로 본 그들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질문 하나를 던지며 한두 마디 하다가도 금방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하지만 고기가 익고 술잔을 부딪히며 조금씩 마음의 틈은 열렸다. '씨'라는 단어를 붙이긴 했지만 어느 순간 서로의 이름을 부르게 됐고, 여행 계획이나 준비물 같은 공통 관심사를 얘기하다 보니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졌다.
불판 열기가 올라오며 얼굴은 붉으스레 해지고 고기의 기름 냄새와 맥주 거품의 쌉쌀하고 고소한 맛이 혀끝에 맴돌 때쯤, 나는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현실에서 분리됐다. 그리고 한 명의 관람객이 되어 영사기 화면을 보듯 대화를 나누는 일행을 지켜봤다.
이주영, 조윤설, 심미정, 유한나, 김건우.
동행들은 여자 넷에 나를 포함한 남자 둘. 모두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었다. 외모는 물론 성격도 말투도 모두 달랐지만 거칠거나 모난 사람은 없어 보였다. 너무 가벼운 사람도 무거운 사람도 없이 함께 여행하기엔 적당히 무난한 조합이었다. 처음 만나 두어 시간 남짓 시간을 보내며 상대방의 모든 걸 파악할 순 없지만 첫인상이 남기는 느낌은 좋았다.
문득 이들 한 명 한 명이 하나의 섬이란 생각이 들었다. 수평선 너머 해무 사이로 희미하게 실루엣만 보이는 섬. 몽골뿐만 아니라 그들 또한 나에겐 미지의 섬이었다. 낯섦의 파도가 망망대해를 따라 밀려왔다.
"파이팅"
건우의 목소리가 망상의 해무를 뚫고 귓등에 꽂혔다. 항해는 이미 시작됐다. 저마다 아직 말로 옮겨지지 않은 기대를 품고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출항은 이제 삼 개월 후. 우리는 다시 만날 그날을 기약하며 현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 후로도 우린 단톡방에서 종종 말을 섞었다. 아무 말없이 며칠을 지내다가 누군가 한마디 던지면 기다렸다는 듯 잡담을 쏟아내며 수다를 떨었다. 9월이면 그래도 여름인데 침낭이 필요할지, 모래언덕에 오를 때 고글은 필요할지 같은 시시콜콜한 주제에 대해 열띠게도 논의했다.
한 번은 조용하던 채팅방에 알림 하나가 울렸다. 한나였다. 홍일점 공대생에 엉뚱한 면이 있던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모래사막 한가운데 파라솔처럼 펼쳐진 우산 사진 하나를 툭 던졌다.
악의 없이 시니컬한 걸 미덕으로 삼는다는 건우가 먼저 반응했다.
"뭐야, 양산? 그래, 사막까지 갔는데 햇빛 걱정은 해줘야지. 너는 소중하니까 ㅋㅋ"
한나는 바로 반격했다.
"아니거든. 이게 바로 몽골식 간이 화장실이야."
건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답했다.
"왓? 이거 현실? 우리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니?"
그러자 외향적이고 활발한 성격에 즉흥적인 의견을 여과 없이 토해내던 윤설도 끼어들었다.
"너 같으면 차 뒤에서 해결해도 되겠지만 우린 아니야. 기왕 할 거면 꽃무늬로 하는 게 어때?"
"갬성 죽이네. 무슨 사막 요정이냐?"
"우산 펼쳐져 있을 때 사진은 찍기 없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와중에 파워 J 주영이 관리하던 여행 준비물 리스트 공유 문서에 아이템 하나가 실시간으로 추가됐다.
'꽃무늬 우산 (대형, 양산 사이즈 X)'
농담과 웃음이 이어지는 사이 여행사가 정해지고 일정이 하나씩 추가되며 8박 9일간의 여행 계획이 완성됐다. 나 혼자였다면 대략적인 이동 루트만 파악하고 무작정 떠났을 텐데 여럿이 여행을 계획하니 참 다양하고 다채롭게 일정이 채워졌다. 텅 빈 지도 위에 협곡과 사막이 나타나고 그 사이로 도로가 그려졌다. 상상 속에선 벌써 수십 번 말을 타고 초원을 달렸다. 그렇게 준비는 끝났고, 마침내 출정일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