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란바토르, 수하바트르 광장, 꿈과 현실의 경계

by 성세윤

첫날은 에어비앤비로 울란바토르에 단체 숙소를 잡았다. 각자 일정에 맞춰 비행기 티켓을 끊은 탓에 첫날은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난 아침 일찌감치 도착해 혼자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내팽개치듯 짐을 풀고 길을 나섰다. 첫 목적지는 도심 중앙에 있는 수흐바타르 광장. 광장중앙에 있다는 칭기즈칸 동상을 보기 위해서였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차선을 넘나들며 곡예운전을 하는 차들을 피해 총총걸음을 걸었다. 매연 탓인지 공기는 다소 탁했지만 날씨는 걷기 딱 좋았다.


대로변에 인파가 늘었다 싶은 느낌이 들 때쯤 탁 트인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곤 갑자기 달라진 공기의 밀도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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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중앙엔 하얀 천막과 함께 커다란 무대가 세워져 있었고, 무대 위 현수막엔 '코리아 페스티벌 위크'라는 한글이 크게 쓰여 있었다.


음, 몽골 여행의 시작이 '코리아 페스티벌'이라니.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몽골인들이 연출하는 한국이 어떤 모습일지 나름 흥미도 생겼다. 친숙한 베이스와 드럼 소리가 가슴을 때렸고, 어디서 본듯한 붉은 조명이 현란하게 무대를 쓸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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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의 시작은 태권도 시범이었다. 하얀 도복을 휘날리는 소년소녀들의 발끝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송판이 부서져 나갔다. 아빠 머리 위로 목마를 탄 소녀는 연신 감탄사를 뿜어댔고 아빠는 즐거워하는 딸아이의 모습에 마냥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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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공연의 하이라이트 K팝 커버댄스 공연이 시작됐다. 몽골 젊은이들은 익숙한 가사에 맞춰 정확한 동작과 생기 넘치는 표정으로 몸을 흔들어 댔다. 하얀 피부에 중성미가 느껴지는 소년과 눈화장을 짙게 하고 화려하게 멋을 낸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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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레게 머리와 무게감 느껴지는 힙합 차림에 현란한 움직임을 보였던 한 댄서였다. 그는 분위기가 고조되자 무대 중앙으로 앞서 나와 몸을 불살랐다. 관중들 또한 호응했고 광장은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박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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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저 그 광경이 신기했다. 몽골 하늘 아래 한국 음악이 이렇게 울린다는 게 신기했고, 아마도 유튜브를 찾아보며 스스로 갈고닦았을 춤 실력에 감탄할 따름이었다.

영혼을 쏟아부은 듯 머리와 셔츠가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무대를 뒤흔든 댄서는 음악이 끝남과 동시에 절도 있는 마지막 동작으로 공연을 마무리했다.

동작은 멈췄지만 그의 몸은 아직 무대 위 전투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달라붙은 셔츠 아래로 심장의 거센 박동이 느껴졌고 관객을 향해 뻗은 손가락은 미세하게 떨렸다. 여전히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눈빛과 자신감 넘치는 미소에선 여유가 넘쳐 보였다.


하지만 그 순간은 아주 잠깐 뿐이었다. 공기의 떨림이 멈추고 음악의 여운이 사라지자 댄서의 어깨는 좁아들었고 눈빛은 여느 중고생과 다를 바 없이 순박하게 변해갔다.

문득 그의 꿈이 궁금해졌다. 아마도 K팝의 정점에 있는 BTS 같은 가수와 한 무대에 서 보는 것 아닐까? 가능성이 없어 보이진 않았다. 호리호리한 몸매와 긴 팔다리는 화려한 춤과 어울렸고, 절도 있는 몸동작을 보면 연습도 만만치 않게 한 것 같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몽골의 K팝 커버 댄서가 연습생을 거쳐 가수가 되고 BTS 같은 그룹과 한 무대에 설 가능성이 있을까? 그러려면 얼마나 많은 우연과 인연이 따라 줘야 할까? 그가 충분히 실력을 갖췄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의 끝은 기껏해야 행사장 공연의 추억을 가지고 사는 평범한 회사원이나 소공상인 정도 아닐까?


K팝을 흥얼거리며 키웠을 꿈의 끝은 여느 일반인과 다를 바 없을 것 같았다. 그건 한국에서 갖은 노력을 다해 살아온 한 회사원의 삶과 다를 바 없었다. 친척들에게 꿀리지 않을 정도의 직급과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월급을 받으며 사는 나 정도의 삶 말이다.


문득 눈을 돌려보니 무대 반대편에 서있던 칭기즈칸 동상이 보였다. 그는 몽골의 하늘을 등지고 단상에 앉아, 압도적인 무게와 힘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광장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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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엔 결코 희망적이라 할 수 없는 꿈을 꾸며 무대 위에서 영혼을 불태우는 청소년들이 있었고, 반대편엔 이미 세계를 자신의 발아래 평정했던 전설적인 역사의 인물이 있었다. 찬란한 역사의 상징은 불나방처럼 꿈을 좇는 청소년들을 아무 말 없이 지켜봤다. 그 거리감과 시간의 간극, 그리고 무게의 차이가 묘한 대비를 만들었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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