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가즈링 촐로 일정을 마친 우린 숙소를 향해 달렸다. 황량한 대지에 먼지 구름을 뿌리며 달리니 바둑판에 놓인 흰 돌처럼 일렬로 늘어선 게르가 보였다. 짐을 풀고 정비를 마쳤을 땐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됐다.
"먼저 식사들 해. 난 근처 좀 돌아다니다 올게."
모두들 식당을 향할 때 나는 가방을 챙겨 따로 길을 나서기로 했다. 숙소 오는 길에 본 호수에서 일몰을 보고 싶어서였다. 차로 5분 거리였으니 걸으면 15분 정도 걸릴 것 같았다.
"저도 같이 가요."
윤설이 따라나섰다. 나도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게 얼마 되진 않았지만 윤설도 최근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고 한다.
"늦어지면 밥 못 먹을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라면 많이 챙겨 왔어요. 괜찮아요 흐흐."
윤설은 뛰는 듯 숙소로 들어가 카메라를 들고 나왔다.
터벅터벅 초원을 걷는 사이 해는 점점 낮아졌다. 바람이 낮게 깔린 풀잎을 쓰다듬었고 발밑에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우리의 존재를 확인해 줬다.
그녀도 나도 말은 없었다. 하지만 고요하다고 텅 빈 건 아니었다. 되려 정적 속에 빽빽이 채워진 감정이 있었다. 무언가 이성적인 느낌은 아니었지만 이런 풍경 속에 남녀가 걷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만들어지는 긴장된 '기류'같은 것이었다.
조금 지나자 호수가 보였다. 물은 잔잔했고 그 위로 황금빛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빛이 물 위에 반사되며 윤슬이 일렁였고, 반짝임은 마치 호수 전체가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순간, 세상은 오직 색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하늘은 한 점의 구름도 없이 매끈하고 깊었다. 파랗다 못해 투명하게 뻗은 하늘이 호수 위로 미끄러져 내려와 물빛까지 푸르게 잠식해 버렸다.
나는 어느새 풍경에 몰입했다. 눈을 깜빡이는 것도 아까울 만큼 풍경 하나하나가 눈 안에, 마음 안에 한 폭의 그림으로 스며들었다.
문득 옆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난 그제야 윤설도 같이 있다는 걸 의식했다. 그녀 역시 풍경에 빠져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옆모습이 붉게 물든 하늘을 그대로 받아 안은 듯했다. 머리카락 끝에 햇빛이 걸렸고 이마 아래로 내려온 긴 속눈썹이 햇살을 품고 조용히 떨렸다.
카메라를 들고 뷰파인더를 바라보는 모습은 어딘가 진지했고, 어쩐지 아름다웠다. 그녀가 긴 손가락을 뻗어 셔터를 누르는 동작조차도 일몰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금빛 윤슬이 그녀의 몸동작을 따라 반짝였다. 그녀와 나 사이에 놓인 어떤 거리와 감정이 따뜻하게 물드는 듯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고 눈빛은 고요했다. 지금의 이 벅찬 감정은 풍경 때문일까 그녀 때문일까? 아니면 둘이 겹치면서 더 깊게 증폭되고 있는 걸까?
사실 상관은 없었다. 아무런 판단이나 분석 없이 그저 솟아오르는 설렘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물결 위 반짝이는 윤슬을 음미하기 위해 광학을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 설렘은 그 자체로 존재했고 나는 그저 고요히 감정 속에 침잠할 뿐이었다.
'부릉부릉'
그때 초원의 정적을 뚫고 오토바이 한 대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며 속도를 줄였다.
오토바이를 탄 아저씨는 챙이 넓은 갈색 모자와 튜닉형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와 자주색 의상은 푸른 초원 위로 퍼지던 분홍빛 여명과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아저씨는 우리 앞에서 오토바이를 비틀어 세우더니 사진을 찍어 달라는 듯 가슴을 펴고 포즈를 잡았다. 윤설은 웃으며 아저씨와 손짓으로 대화를 나누더니 열심히 카메라를 조작하며 아저씨의 모습을 담았다.
생각해 보니 윤설은 점심때 들린 식당에 있던 아이에게도 사탕을 건네며 사진을 찍었었다.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행동이었다.
나도 아저씨 모습을 담아보곤 싶었지만 차마 앞까지 다가가지 못하고 근처에서 급히 셔터만 몇 번 눌렀다.
결과물은 참담한 수준이었다. 인물 사진인데 시선도 맞지 않았고, 급히 찍다 보니 포커스도 흔들렸다.
내 시선에 잡혔던 아저씨의 당당함 그리고 풍경과 어우러진 오토바이 모습을 제대로 담으려면 윤설이처럼 한걸음 다가서야 했지만 쉽게 나설 수 없었다. 한걸음 다가서는 게 왠지 넘어선 안될 경계를 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결국 아저씨 사진은 포기했다. 난 등을 돌려 해가 넘어가고 있던 언덕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언덕 위로 하얗게 물결치는 실루엣이 보였다. 뭐지? 육안으론 확인이 안 됐는데 반사적으로 망원렌즈를 끼고 셔터를 눌렀다. 확대해서 보니 양 떼가 언덕을 지나가고 있었다. 떼를 이루어 이동하는 그들의 실루엣이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태양과 겹쳐졌다.
붉은 하늘과 어두운 그림자 그리고 하얗게 빛나는 실루엣. 심장박동은 멎어버렸고 셔터를 누르는 것도 잊어버렸다. 역사 속 거장이 영적 체험을 한 후 한 폭의 그림을 그려 놓은 듯했다.
시선이 여전히 언덕에 사로잡혀 있는 사이 다시 윤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저씨는 이미 갈길을 떠났고 윤설도 언덕 너머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다가온 것이다. 그녀는 내 옆에 서서 카메라 뷰파인더에 눈을 대고 조심스레 풍경을 담아냈다.
잠시 후 해는 언덕 너머로 넘어갔다. 그녀는 카메라에서 얼굴을 떼고 너른 시선으로 호수와 언덕을 바라봤다.
내 시선 또한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강렬했던 일몰의 따뜻함 때문인지 그녀의 시선이 열려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 걸음만 더 다가서면 그녀의 시선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고, 손만 뻗으면 붉그레한 그녀 얼굴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쿵하고 심장이 떨어졌다.
동시에 망설임도 있었다. 방금 전, 경계를 넘어 아저씨의 모습을 담아내지 못했듯 지금도 강하게 날 밀어내는 경계가 느껴졌다. 뚫고 들어가기보단 한 발짝 뒤에서 바라보는 게 어떻겠냐며 그 경계가 날 설득했다.
해는 완전히 저물었지만 감정은 지평선을 물들이는 석양처럼 오래도록 지속됐다. 일렁이는 감정과 더불어 여러 갈래의 생각들이 겹겹의 파문을 만들었다. 달에 의해 조수가 발생하듯 분명 마음이 동요되기 시작한 이유는 있었겠지만 그 시작점을 알 길은 없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과 설명하려 해도 닿지 않는 생각이 나를 가만히 덮고 또 스쳐갔다. 내가 담아냈던 풍경과 담아내지 못했던 감정들이 멀리 보이는 지평선을 사이에 두고 교차했다.
그렇게 숙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따금 석양을 담기 위해 발걸음을 멈춰 서던 윤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