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가즈링 촐로, 바위의 시간

by 성세윤

숙소로 돌아오니 다른 일행들도 하나둘씩 깨어 있었다. 욕실에서 샤워기 물소리가 시원하게 새어 나왔고 방에선 캐리어를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단톡방에선 '오늘 몇 시 출발이야? 언제까지 일어나야 되지?' 같은 질문들이 어지럽게 쏟아졌다.

일찌감치 준비를 마친 주영은 복도를 분주히 돌아다니며 준비 상황을 확인했다. 삼남매 맏언니에 맞벌이 부모님 대신 혼자서 동생들을 다 키웠다고 하더니 침대에서 늑장을 부리던 윤설과 한나를 다그치며 일으켜 세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건우가 에티오피아에서 직접 공수했다는 예가체프를 내리기 시작하자 산미가 물씬 풍기는 커피향이 집안 가득 퍼졌다. 모두들 인간의 숨결을 따라가는 좀비처럼 몽롱한 눈빛으로 부엌에 모여들었다. 배급을 받듯 차례로 컵을 들고 카페인을 충전했다. 그리곤 생명수를 마신 듯 눈에 생기를 발하며 침대가 편했다느니 잠이 덜 깼다느니 하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렌탈 하우스는 슬리퍼 끄는 소리와 캐리어 지퍼 여는 소리 그리고 작은 웃음들로 가득했다.


"왔다!"

카톡 메시지를 확인하던 주영이 소리쳤다. 윤설은 치약 거품으로 뒤덮힌 입술 사이로 칫솔을 깨문채 창문으로 뛰어갔다. 그리곤 알아들을 수 없는 감탄사를 웅얼거리며 손짓했다.

숙소 앞 주차장에는 청회색 푸르공이 위풍당당히 세워져 있었다. 낡고 묵직한 몸체, 먼지가 얇게 낀 철제 외피, 모래사막이건 진흙밭 초원이건 거침없이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굵직한 타이어. 사진에서 익히 봐왔던 모습 그대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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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는 한국에서 3년 간 어학연수를 했다는 소미, 기사는 운전 경력만 30년이 넘었다던 버기였다. 소미는 활짝 웃으며 친근하게 우릴 반겨 주었다. 버기는 무뚝뚝하고 고집있어 보이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일부러 입구까지 나와 캐리어를 받아 들어 푸르공 뒤에 차곡차곡 실었다. 미정이 고맙다고 한 마디 건내자 무심히 고개만 까딱이는 모습에선 그만의 캐릭터가 느껴졌다.

차에 타려는데 주영이 한나를 불러 한참을 소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이게 최선이야"라고 선언하며 자리배치와 순번을 내밀었다. 후기에서 읽었던 자리별 불편함과 이동시간 그리고 비포장 도로 여부까지 고려했다고 하니 달리 따질 이유는 없었다.

가위바위보로 정한 선호도에 따라 첫 날 자리를 정하고 소미가 간단히 일정 설명을 마칠 즘 푸르공의 거친 엔진소리가 울렸다.




차에 오르고 1시간 정도 지나자 다소 막히던 울란바토르 도심을 벗어났다. 도로는 점점 거칠어졌고 건물들은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방으로 광활한 평지가 펼쳐졌다. 하늘은 낮았고 지평선은 끝을 모르게 늘어졌다. 소리 없이 부는 바람만이 우리를 환영하는 듯 불어왔다. 이따금 무단횡단을 하는 양떼에 멈춰 서기도 하고 마을에 들려 현지식으로 점심도 즐기며 여정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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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행선지 박가즈링 촐로에 도착한 건 이른 오후 쯤이었다. 광활한 평원 위로 바위산들이 낙타 등처럼 불쑥 불쑥 솟아 있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기만 했다.

거친 자갈길을 조금 걸으니 폐허가 된 사원이 있었다. 낡은 돌담과 무너진 기둥만이 오래 전 자리를 떠난 수도승들의 흔적을 말해주는 듯 했다. 너덜지대를 10분 정도 오르니 정상이 바로 나왔다. 몇 시간 정도 걸리는 하이킹 코스도 있지만 보통 여행객들은 하이킹 없이 바로 조망을 볼 수 있는 이곳을 선호한다고 한다.

정상 한 귀퉁이에 서서 멀리 보이는 산과 들을 보았다. 바람이 바위 틈을 지나며 피부를 스쳤다.

접지력 좋은 등산용 샌들로 무장한 나는 바위를 뛰어 다니며 뷰포인트를 찾아 다녔다. 구도가 괜찮던 스팟 몇 군데를 찾아 사진을 찍고 있는데 건우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다가왔다. 난 눈짓으로 절벽 끝을 가리켰다. 건우는 망설임 없이 걸어가 포즈를 취했다. 그리곤 자연스레 한 명씩 돌아가며 같은 자리에 섰다.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사진을 찍는게 어색하긴 했지만 적응이 어렵진 않았다. 이렇게 돌아가며 서로의 모습을 담아보는 것도 함께 여행 다니는 재미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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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산에서 내려와서는 인근에 있는 언덕에 올랐다. 바위 사이로 뚫린 주먹만한 작은 구멍 위로 솟아오르는 샘물도 보고, 타원형으로 뚫려 푸른 하늘이 가득히 보이는 동굴에도 들렸다. 푸르공에 올라 사진도 찍어보며 고즈넉한 오후 풍경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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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하진 않았지만 거대하고 고요한 대지의 입구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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