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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Jul 27. 2021

20. 힐링팩터

코드3. 영웅의 여정은 끝없는 정진이다

북유럽 신화 속 전사가 사망하면 발키리는 전사의 혼을 오딘의 궁전 발할라로 데려가 연회를 벌인다. 태고적부터 모인 전사의 혼이 발할라를 가득 메우고 전사들은 꿀로 담근 술을 들이키며 연회를 즐긴다. 안주로는 세흐름니르라는 멧돼지 고기를 먹는다. 한껏 여흥을 즐기다 해가 뜨면 전사들은 연회장에 장식된 무기를 집어 들고 일어선다. 그리고 언제 먹고 마시며 즐겼냐는 듯 치열히 서로와 싸운다. 전사로서 갈고 닦은 검술을 선보이며 지쳐 쓰러질 때까지 화려한 검무를 펼친다. 해가 지면 쓰러졌던 전사들이 하나 둘씩 일어나 발할라로 모여든다. 오딘은 용맹한 영웅들을 치하하며 다시 천상의 연회를 베푼다. 세흐름니르도 어느새 되살아나 살이 퉁퉁 불어 올라 있다. 전투와 연회는 끝없이 되풀이 되고 세흐름니르도 매일 다시 태어난다.



전장에서의 명예롭게 죽은 전사들에게 발할라는 천국이다.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뽐내고 그 노고를 치하 받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니 전사로서는 축복받은 삶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사들의 천국에 갖혀 지옥보다 더한 고통을 받는 이가 있다. 바로 세흐름니르다. 매일 뼈가 드러날 정도로 살이 잘리고, 펄펄 끓는 물에 빠져 고통스런 죽음을 당해야 한다. 돋아나는 살을 매일같이 도려내는 아픔을 감당하는 것 보다 힘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슈퍼히어로 중에도 이런 고통을 감내하는 자가 있다. 바로 힐링팩터를 가진 울버린이다. 울버린은 돌연변이로 태어날 때부터 초재생능력을 지닌다. 상처가 바로 치유될 뿐만 아니라 팔다리가 잘리거나 해도 재생된다. 일반인에 비해 후각과 같은 감각도 예리하고, 1800년대에 태어난 그가 2030년이 되서야 늙어가니 노화도 느리다. 울버린은 돌연변이를 무기화하려는 웨폰X 프로젝트에 일환으로 지구상 가장 강하다는 ‘아다만티움’ 금속 골격을 이식받는다. 생뼈에 주사기로 액화금속을 주입하는 고통을 견뎌낸 울버린은 아다만티움 골격과 클로를 갖춘 인간병기가 된다. 아다만티움 골격과 그 골격 위로 끝없이 재생되는 신체를 갖춘 울버린은 그야말로 힐링팩터 능력을 갖춘 슈퍼히어로의 정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신체가 재생된다고 하여 아픔이 없는 건 아니다.



울버린이 늙어가며 재생기능이 쇠퇴하고 병들었을 때의 이야기를 다룬 수작 ‘로건’엔 울버린의 아픔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로건’의 이야기는 힐링팩터와 현실의 교차점에서 시작한다. 리무진 드라이버 로건은 지친 몸으로 차에서 잠이 들었다 북적거리는 소리에 깬다. 불한당들이 차 바퀴를 훔치려 랜치를 돌리는 소리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로건은 무거운 몸을 끌고 불한당들을 대적한다. 이리저리 구타를 당하고 상처는 예전처럼 잘 아물지 않는다. 클로를 뽑아 보지만 칼날은 끝까지 나오지도 않는다. 불한당들의 주먹질과 발길질에 살갗이 찢긴다. 온 몸에 총알이 박히고 피가 난무하는 잔인하기 그지 없는 격투다. 선혈이 낭자한 격투 장면을 보다 보면 수백년간 매일 같이 고통 속에 살아왔을 울버린의 아픔이 쓰리게 느껴진다. 벌겋게 베인 상처가 바로 아물긴 하지만 그 찰라에도 벌어진 살갗 사이로 찬바람은 살을 애는 듯 불어온다. 아무리 재생이 된다 해도 뼈가 부러져 뒤틀리며 안으로부터 살을 찢고 나오는 고통은 차라리 죽음을 동경할 만큼 지옥같은 아픔이다. 


젊은 시절 울버린에게 그런 고통은 그의 존재의 의미이자 그가 감내하고 나아가야 할 자신의 정체성이었을지 모른다. 그 고통 속에 전사로서 그의 자아가 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재생능력도 쇠퇴하고 병까지 앓고 있는 그에게 고통은 어떤 의미가 있을 까? OST에선 조니 캐시가 컨츄리 풍의 잔잔한 기타 소리와 함께 ‘상처’라는 곡으로 로건의 아픔을 연주한다.


오늘 난 내게 상처를 냈소
내게 아직 감각이 남아있는지 알기 위해|
난 아픔에 집중하오
오직 그것만이 진실이기에
세월의 얼룩에 덮여
그 감정들은 모두 사라져버렸소
당신은 낯선 이가 되어버렸소
나는 아직도 여기 있었는데
가질 테면 다 가지시오
더러움만이 남은 나의 제국에서
난 그댈 실망시키고
난 그대를 상처입힐 것이오
나는 여전히 나인채로
나는 길을 찾아내고 말겠소


힐링팩터를 지닌 또 다른 슈퍼히어로는 데드풀이다. 데드풀 역시 웨폰X 프로젝트를 통해 힐링팩터를 얻게 된다. 용병 웨이드 윌슨은 암을 치료하기 위해 웨폰X 프로젝트에 지원하고, 울버린의 DNA로 만든 세럼을 맞는다. 하지만 세럼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고, 실험은 실패로 끝난다. 실험실에 갖힌 웨이드는 폐물 취급을 받으며 상처와 고통에 대한 반응을 테스트하기 위한 모르모트로 이용당한다. 괴로움이 극한에 달했을 때 마침내 세럼이 활성화 되고 웨이드도 힐링팩터를 얻게 된다. 힐링팩터가 웨이드의 암을 치료한 건 아니다. 암 세포는 끝없이 전이되어 웨이드 전신에 퍼지지만 힐링팩터가 이를 저지하며 죽음을 면할 뿐이다. 웨이드의 몸은 암세포와 힐링팩터가 끊임없이 투쟁하는 전장이다. 암세포가 증식하며 악성종양이 되어 조직을 파괴하면 힐링팩터는 파괴된 조직을 원복시킨다. 악성종양은 전신에 퍼져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피부는 분화구처럼 일그러진다. 뇌 어딘가에 자리잡은 종양 덕에 정신도 이상하다. 



데드풀의 힐링능력은 울버린 만큼이나 뛰어나다. 몸 어느 부위가 잘리던 바로 재생되고, 심지어 잘려나간 손가락 하나에서 머리와 몸 전체를 재생될 정도다. 그러나 재생은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어난다. 그는 죽을 수 조차 없다. 고층빌딩에서 떨어지고 하수구 세척제를 마셔도 멀쩡하다. 석유통 위에 올라 앉아 자신을 폭파시켜도 어딘가 떨어진 한 조각 피부조직에서 온몸이 재생된다. 일그러진 외모로 온 몸에 종양을 달고 산다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로건에게도, 웨이드에게도 힐링팩터는 영원히 재생되는 삶의 아픔이다. 치열한 격전지에서 로건과 웨이드는 적과 싸우며 매번 깊은 상처를 입는다. 상처는 사라지고 몸은 원복되지만 상처에 대한 기억은 남는다. 깊게 베인 살이 다시 봉합되고, 총알이 관통한 몸통은 다시 메워져도 살이 베일 때의 쓰라림과 총알이 관통될 때의 충격은 매번 고통스럽다. 적을 맞이 할 때마다 그 상처의 고통이 조건반사적으로 상기된다. 아무리 재생된다 해도, 아무리 회복된다 해도, 상처와 아픔에 무뎌 질 수 있을까? 오히려 반대다. 새로이 재생된 신선한 세포로 가득한 감각기관 덕분에 고통과 쓰라림은 매 순간 어느 때보다 생생히 느껴진다. 로건이 관절을 찢으며 클로를 꺼낼 때나 웨이드가 실실 웃으며 적에게 맞을 때, 그들은 누구보다 아프다. 그럼에도 그들은 적과 맞선다. 고통과 아픔을 견뎌내고 상처를 받아 들인다. 힐링팩터가 있기 때문에, 치유될 걸 알기 때문이 아니다. 치유가 되더라도 아프다. 아픔이 두렵지만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이다. 영웅이 된다는 건 그 순간을 감내하는 것이다. 아픔의 순간, 고통의 순간을 온 몸으로 느끼며 이겨 나가는 것이 영웅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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