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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Jul 01. 2020

19. 불살의 길과 끝없는 고행

코드3. 영웅의 여정은 끝없는 정진이다

동그랗게 뚫린 하늘 아래 땅 속 깊숙이 파인 구덩이가 있다. 높이 보이는 푸른 하늘은 희망이 되지만 어두운 구덩이 속을 빠져나가긴 불가능에 가깝다. 벽을 따라 튀어나온 벽돌을 잡고 올라가보려 하지만 누구 하나 성공하지 못한다. 손을 한번 잘못 짚거나 발을 한번 잘못 디디면 그대로 수십미터를 추락한다. 이곳이 ‘라자루스 핏’이다. 라자루스 핏은 재생의 구덩이다. 수백 년간 살아온 것으로 알려진 라즈알굴은 라자루스 핏에서 상처와 노환을 치료한다. 브루스는 베인에게 패한 후 상처를 입은 체 라자루스 핏에 갇힌다. 브루스는 핏에서 탈출하려 여러 차례 시도하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갖은 고생을 다해 핏을 올라가지만 정상에 다다를 때쯤 꼭 마지막 관문을 극복하지 못하고 떨어진다. 


배트맨이 라자루스 핏에 떨어진 결정적인 이유는 베인에게 패해서지만 거기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바로 배트맨이 고수하는 불살의 원칙이다. 라즈알굴이 도둑의 처형을 명했을 때도, 배트포드를 타고 조커에게 돌진할 때도 배트맨은 악인을 죽이지 않는다. 그 덕분에 악인들은 아무리 제압해도 되살아 난다. 한때 평화로웠던 고담시가 다시 베인에 의해 타락하고 절멸할 위기에 처하게 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불살의 원칙을 고수하기에 배트맨은 아무리 물리쳐도 되살아나는 악에 대항해야 하고, 떨어지면서도 다시 올라가야 하는 라자루스 핏에 빠진 것이다. 배트맨은 왜 스스로를 이런 운명적 굴레에 빠트렸을 까?



끝없는 고행을 반복하는 배트맨의 모습은 시지프스를 떠오르게 한다. 시지프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코린토스의 왕이다. 호머에 따르면 시지프스는 가장 현명하고 명민한 인간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신을 기망한 죄로 제우스의 노여움을 산다. 제우스가 요정 아이기나를 납치할 때 현장을 목격한 시지프스는 아이기나의 아버지이자 강의 신인 아소포스에게 이를 밀고하여 물이 부족한 코린토스에 마르지 않는 샘물을 얻는다. 화가 난 제우스가 그에게 죽음의 신인 타나토스를 보내지만 시지프스는 속임수로 타나토스를 결박하여 굴속에 가두고, 지하의 왕 하데스에게 끌려갈 때는 거짓말로 그를 속여 지상으로 돌아온다. 결과적으로 시지프스는 신을 능멸하며, 죽음에 저항하고, 삶을 사랑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산 것이다. 


그런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신들의 형벌이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고 타나토스에 끌려 하데스에게 돌아 오자 제우스를 비롯한 신들은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가혹한 형벌을 내리기로 한다. 제우스가 시지프스에게 내린 형벌은 바위를 언덕 위까지 굴리는 것이다. 언덕위에 올려진 바위는 아래로 떨어지고 시지프스는 다시 언덕 위까지 바위를 옮겨야 한다. 영원히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끊임없이 밀어 올려야 한다. 돌 표면에 온 몸을 밀착한 체 손과 어깨로 있는 힘을 다해 돌을 밀면 까칠한 표면에 온 몸은 상처 투성이 된다. 가시같이 모난 돌은 온 몸에 박히는 듯 하고 근육은 끊어 질 듯 당겨온다. 하지만 제우스가 시지프스에게 내린 진짜 형벌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다. 그런 고통에서 벗아날 길이 없다는 희망의 부재야 말로 가장 치명적이다. 아무리 돌을 올리고 또 올려도 다시 돌을 올려야 한다는 허무한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대적 상황이 제우스가 시지프스에게 내린 진짜 형벌인 것이다. 



현대에 들어 시지프스의 신화가 다시 주목받게 된 건 알버트 카뮈의 에세이 '시지프스의 신화' 덕이다. 카뮈는 자의와 무관하게 노동에 시달리고 그 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마저 박탈당한 시지프스를 '부조리한 영웅'이라 부른다. 


"신들에 대한 멸시, 죽음에 대한 증오, 그리고 삶에 대한 열정은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일에 전 존재를 다 바쳐야 하는 형용할 수 없는 형벌을 그에게 안겨 주었다. 이것이 이 땅에 대한 정열을 위하여 지불해야 할 대가이다."


카뮈는 정열의 대가가 그 무엇도 달성할 수 없는 허무인 상황을 부조리라 지칭한다. 하지만 카뮈는 부조리의 뒷면에 바로 행복이 있다고 말한다. 시지프스는 그 무엇도 달성할 수 없는 허무에도 불구하고 돌을 끌어 앉은 체 힘찬 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 걸음은 신에 대한 저항이자 삶에 대한 의지다. "경련하는 얼굴, 바위에 밀착한 뺨, 진흙에 덮인 돌덩어리를 떠받치는 어깨와 그것을 고여 버티는 한쪽 다리, 돌을 되받아 안은 팔 끝, 흙투성이 된 두 손"이 바로 그의 존재에 대한 증거이자 의미다. 시지프스는 그 스스로가 삶의 의미다. 돌을 언덕에 올려 놓는 것이나 돌이 굴러 떨이지는 것은 모두 그가 받아들여야 할 운명적 상황에 불과하다. 그의 존재는 그런 상황에 부딪히며 느끼는 그의 숨과 땀인 것이다. 시지프스는 언덕 아래로 돌이 굴러 떨어질 때 하늘을 보며 말한다.


"정상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시지프스의 계보를 타고 올라가면 그의 고조 할아버지 격인 프로메테우스가 등장한다. 프로메테우스는 '먼저 생각한다'라는 이름이 뜻하듯 지식과 계몽을 표상하는 신이다. 그는 진흙으로 몸을 빚고 아테나에게 지혜와 생명을 불어 넣어 인간을 창조한 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창조주 답게 제우스와 다른 신들에 맞서 인간을 보호하고 지켜준다. 어느 날 인간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제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빼앗자 프로메테우스는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친 댓가로 벌을 받게 된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카우카소스 산 정상에 끌고 가 쇠사슬로 결박한다. 그리고 독수리를 불러 매일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 먹게 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신이라 죽지 않고 그의 간은 매일 되살아 나지만 그는 영원히 결박당한 체 간을 쪼이는 고통을 견뎌야 한다.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은 감정적이고 정신적이다. 프로메테우스는 형벌로 간을 내주어야 한다. 그리스 시대에는 신체의 각 기관이 다양한 감정과 연결된다고 믿었는데 간은 분노와 절망 같은 부정적 감정으로 보고로 알려졌다. 카우카소스 산 정상에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는 저주 받은 운명을 생각하며 매일같이 분노에 차 오른다. 분노와 함께 부풀대로 부푼 그의 간을 독수리가 쪼아 먹는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은 그의 몸을 휩쓴다. 하지만 독수리가 간을 쪼아 먹을수록 쪼그라드는 간처럼 분노와 절망도 줄어 든다. 게다가 프로메테우스는 이성의 신이다. 간이 찢기는 듯한 고통이 더해 갈수록 그의 정신만큼은 감정이 사라지며 맑아 졌을 것이다. 그리고 밤이 되면 모든 감정이 정제된 순수한 이성으로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여기서 왜 이 형벌을 받고 있는가?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까?”


그는 밤을 지새며 자신의 존재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사유했을 것이다. 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다는 절망에 다시금 분노에 휩싸이며 그의 간은 부풀어 오른다. 그리고 아침해가 떠오르면 어김없이 산등성이를 타고 독수리 한 마리가 유유히 날아온다. 지옥 같은 아픔이 다시 시작된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건 자신의 형벌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가진 신적 이성과 지식에도 불구하고 언제 이 형벌에서 벗어 날 수 있을 지 알 수 없다는 현실에 절망하고 고통받는 것이다. 이 정신적 고통이야 말로 프로메테우스가 받고 있는 형벌의 본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프로메테우스는 사유한다. 살을 짓이기는 고통에도 신에게 도전하며 담대한 한걸음을 내딛는 시지프스처럼 프로메테우스도 그 어디에도 없는 존재의 이유에 대해, 삶에 대해 사유한다. 그건 사유하는 것이 지성의 신인 그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끝없는 사유야 말로 그에게 형벌을 내린 신에 대한 그의 담대한 도전인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는 프로메테우스에 관한 네 가지 신화에 대해 썼다.


프로메테우스에 관한 네 가지 신화가 있다.
첫번째 신화에 따르면 그는 인간을 위해 신을 배신한 대가로 카우카소스 산에 결박 당했고, 신들은 독수리를 보내 영원히 재생되는 그의 간을 먹게 했다.
두번째 신화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는 살을 찢는 아픔을 못 이겨 바위 속으로 파고 들어갔고, 결국 바위와 하나가 되었다.
세번째 신화에 따르면 수천년이 흘러 그의 배신은 신들에게, 독수리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조차 잊혀졌다.
네번째 신화에 따르면 모두가 이 의미 없는 사건에 대해 지쳐갔다. 신들도 지쳤고, 독수리도 지쳤고, 상처도 지쳐 아물어갔다. 
남은 건 설명할 수 없는 바위 덩어리 뿐이다. 신화는 이 설명할 수 없는 걸 설명하려 한다. 진실의 근저에서 비롯됐지만 결국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다.


카프카는 이 네 가지 신화를 통해 신화의 기원을 추적한다. 그는 신화가 ‘진실의 근저’에서 시작하여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끝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반대로 신화의 시작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카우카소스 산과 바위는 그저 자연 그대로 있을 뿐이다. 그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기원을 만들어 낸 건 인간의 사고다. 



실제로 그리스에 있는 카우카소스 산을 보면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한다. 높게 솟은 봉우리는 하늘을 떠받들 듯 하고 바위로 둘러 쌓인 산 정상은 위협적이다. 그리스 인들이 카우카소스 산을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산을 보며 그리스 인들은 벌을 받고 있는 ‘프로메테우스’를 상상했는 지도 모른다. 산이 존재하는 이유, 바위가 존재하는 이유와 저 산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며 결국 자신의 존재를 사유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본 따 이성의 신 프로메테우스를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배트맨은 불살의 원칙을 고수하며 시지프스가 겪는 끝없는 육체적 노동과 프로메테우스가 겪는 존재의 고뇌를 모두 감수한다. 끝없이 악에 저항하며 악의 근원이 무엇인지, 분노와 두려움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는다. 자신의 존재와 역할을 고민한다. 그리고 허구에 불과할지도 모를 의미를 찾아, 살이 찢기는 고통과 아픔을 감내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영웅의 삶이란 그렇게 끝없이 사유하고 행동하며 의미를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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