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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Jun 18. 2020

18. 가치의 충돌

코드3. 영웅의 여정은 끝없는 정진이다


깊은 밤 싸구려 네온사인 불빛만 깜빡거리는 바 뒷문 밖 주차장으로 잭과 타일러가 나온다. 집이 불타 갈 곳이 없던 잭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풀어 헤친 체 축 처진 어깨로 어정쩡히 서있다. 타일러는 버건디 가죽자켓 깃을 세우고는 담배연기를 뿜어대며 잭에게 자신의 집에 머물러도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잭에게 부탁한다.

“날 있는 힘껏 때려!”

무슨 말이냐며 당황하는 잭에게 타일러는 싸워보지도 않고 자신을 어떻게 아냐며 그냥 때리라 말한다. 머뭇거리던 잭은 가방을 내려놓고 주먹을 쥐어본다. 어설프게 몸을 흔들며 폼을 잡은 잭은 ‘퍽’하고 타일러 귓가에 주먹을 꽂는다. 잭과 타일러의 첫 파이트를 시작으로 상대와 싸울 수 있을 때까지 싸워야 하는 ‘파이트클럽’이 결성된다.


사회에 불만은 많지만 표출하기 꺼리는 소심한 잭은 거칠 것 없는 타일러를 동경하면서도 점점 환멸을 느낀다. 광폭하는 타일러의 폭력성에 경계심을 느끼고 삼각관계를 이루는 말라를 사이에 두고 갈등한다. 특히 타일러가 자신 몰래 ‘메이헴 프로젝트’라는 테러를 계획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갈등은 고조된다. 타일러는 자신을 저지하는 잭을 두고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다. 잭은 타일러를 막기위해 그의 행방을 추적한다. 투명인간을 쫓듯 수십개의 도시와 바를 찾아다니던 잭은 망설임 끝에 말라에게까지 연락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타일러는 다름아닌 잭 자신이었다.



잭 역의 에드워드 노튼과 타일러 역의 브래드 피트이 연기한 건 같은 사람의 다른 자아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특유의 어둡고 스타일리쉬한 연출로 잭과 타일러의 ‘충돌’을 그려낸다. 정신이 혼미해지듯 아웃 포커싱이 되거나 혼란스럽게 카메라를 흔들어 대는 식이다. 잭과 타일러의 충돌은 말 그대로 정체성의 충돌이다. 말끔히 슈트를 입지만 넥타이는 삐뚤게 맨 노튼은 억압에 굴복해 순종하는 자아고, 근육질 상반신을 드러내며 주먹을 날리는 타일러는 체제를 파괴하고 무질서를 향해 질주하는 자아다. 에드워드 노튼과 브래드 피트의 상반된 이미지, 그들이 툭툭 던지는 반사회적 언사, 그리고 정신분열적 성향을 그대로 담아낸 연출 스타일이 어우러지며 서로 다른 자아가 충돌하는 역동적인 ‘파이트클럽’이 그려진다. 



이제까지 모든 슈퍼히어로 스토리는 히어로와 빌런 사이의 ‘파이트’에 대한 스토리다. 슈퍼맨과 렉스, 배트맨과 조커, 스파이더맨과 그린 고블린 등 수많은 슈퍼히어로와 빌런이 서로와 대치한다.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은 ‘언브레이커블’에서 슈퍼히어로와 빌런이 어떻게 충돌하며 서로의 정체성이 드러나는지 보여준다. 빌런 일라이자는 유전적 결함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는 선천적으로 특정 단백질이 합성되지 않아 뼈가 비정상적으로 약하다. 태어나 지금껏 54번의 골절상을 입었고, 항상 지팡이를 짚고 조심히 다녀야 한다. 유리처럼 약하다 하여 ‘미스터 글래스’라 불리는 일라이자는 어릴 때부터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는다. 그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건 그가 가진 단 하나의 호기심이다. 바로 세상 어딘가 자신과 반대되는 특징을 지닌 사람이 있지 않을 까 하는 의문이다. 신체적 능력이 탁월하고 회복이나 면역력도 뛰어난, 코믹스에나 나올 법한 히어로 말이다. 



어느 날 일라이자는 131명이 사망한 열차 탈선사고에서 철과상 하나 없이 살아남은 데이빗에 대한 뉴스를 보게 된다. 데이빗은 삶의 의욕을 잃은 게 아내와 각방을 쓴 기간만큼 오래된 경비원이다. 일라이자는 데이빗에게 찾아가 그가 미스터 글래스인 자신과 반대되는 강철인간이자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태어난 슈퍼히어로 감시자일 가능성을 제시한다. 데이빗은 일라이자의 말에 절레절레 고개를 휘젓지만 어느 덧 의심은 싹트기 시작한다. 한번도 아프거나 다쳐본 적 없는 그의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이 이토록 무기력한 게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신체 능력을 외면하고 있어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필라델피아 역사로 향한 데이빗은 두 팔을 벌린 체 운명을 받아 들이듯 자신의 능력을 느껴보려 한다. 사람들이 스쳐 지나칠 때마다 그들의 범죄적 성향과 행적이 플래시백처럼 인지된다. 그가 집중하면 집중 할수록 점점 더 선명히 느껴진다. 데이빗은 그 중 신문에 종종 나오던 연쇄살인범을 찾게 되고 그를 뒤쫓아 격투 끝에 처단한다. 그 날 밤 데이빗은 몇 년 만에 아내와 한 침대에서 잠을 청한다.



데이빗은 이 후 일라이자를 찾아간다. 기쁘고 고마운 마음으로 일라이자와 악수를 하는 순간 데이빗의 머릿속에 일라이자의 과거가 스쳐지나간다. 일라이자는 자신의 열차 탈선 현장을 비롯해 수많은 테러 사건 현장에 있었다. 순간 데이빗은 깨닫는다. 일라이자는 자신과 반대되는 강철인을 찾기 위해 그 모든 테러를 계획하고 범했던 것이다. 일라이자는 혼란스러워 하는 데이빗을 향해 말한다.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게 뭔지 아나?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 자신의 존재이유를 모르는 거지. 그 기분은 정말 끔찍해. 나도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지. 나 자신에게 수없이 물어봤다네. 하지만 자네를 찾았어. 희생은 많았지만, 모든 게 나의 반대인 자네를 찾기 위해서 였어. 이제 우린 서로의 정체성을 알았어. 난 내가 누군지 알았어. 난 실패작이 아니야. 이제야 앞뒤가 맞아. 만화에 나오는 슈퍼빌런을 알아보는 방법이 뭔지 아나? 그는 영웅과 정반대의 인물이야. 그리고 대부분은 자네와 나처럼 친구 사이야.


조커가 배트맨에게 ‘네가 나를 완성하는 거야’라고 말했듯 일라이자와 던은 서로를 정의한다. 서로 충돌하며 서로의 차이점을 인지하면서 자신이 누구고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들에게 충돌은 자신의 정체성을 인지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다. 데이빗은 아프지도 상처 나지도 않는 자신의 육체적 능력이 두려워 이를 감추려 한다. 능력을 마음껏 펼치며 악을 응징하고 픈 욕망은 억압되고, 그는 무언가 상실한 듯한 허탈감을 안고 일상을 이어간다. 일라이자 또한 유리처럼 부서지는 신체 때문에 항상 놀림을 받는다. 그 신체 뒤로 숨겨진 뛰어난 지적 역량을 알아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들은 서로와 충돌한 후에야 자신의 능력을 자각하고 사명을 깨닫는다. 그들의 충돌은 서로가 부딛히며 부서지는 충돌이 아니다. 충돌을 통해 자신이 어디로 튕겨지는 지,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하며 자신의 길을 찾게 되는 결정적 계기다. 

히어로와 빌런이 충돌하며 상호보완적으로 진화하는 과정은 헤겔의 변증법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변증법은 헤겔이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차용한 개념으로 정, 반, 합의 세가지 단계를 거친다. 하나의 가치가 있으면 항상 이에 반하는 반대 가치도 있다. 두 가치는 서로 대립한다. 대립을 통해 반대되는 성질은 더욱 뚜렷해지고, 이는 두 가치 사이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킨다. 대립이 극에 달하면 두 가치는 서로 충돌한다. 충돌을 통해 기존 가치는 파멸되고 그 위로 새로운 가치가 탄생하는 데 이 새로운 가치는 반대되는 두 가치가 어우러지며 만들어진 ‘합’으로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가치에 반대되는 가치가 다시 등장하며 정, 반, 합의 과정이 되풀이 된다. 


헤겔은 인류의 역사가 이 변증법을 통해 전개되어 왔다고 믿었다. 고대 왕권 국가에서는 군주와 노예가 대립했다. 이들의 대립을 통해 절대 왕권은 아니지만 제한된 권력을 가진 중세의 영주 계급이 탄생했다. 영주는 농노와 대립했고, 이 대립을 통해 근대 자본가 계급이 나타났다. 그리고 자본가는 다시 노동자 계급과 대립하게 된다. 계급 간 충돌과 진화의 역학이 역사가 전개되며 드러난 것이다. 



히어로와 빌런도 마찬가지다. 표면적으로 그들은 절대 선과 절대 악을 대표하는 정반대의 존재로만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충돌할 때면 모순적인 면이 드러난다. 슈퍼맨과 조드장군이 격돌하며 도시가 파괴되고 수많은 민간인들이 받은 피해를 고려하면 슈퍼맨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공권력과 대립하며 수많은 사상자를 내는 마그니토의 폭력은 돌연변이 종족을 보존하려는 지극히 자연스런 생존본능에 불과하다. 마그니토 입장에선 종족보호가 정의인 것이다. 히어로와 빌런이 대립하고 충돌하면 할수록 선과 악의 경계는 더욱 모호해진다. 그래서 배트맨이 슈퍼맨을 적으로 간주하거나 마그니토와 찰스 자비에가 같은 편이 되는 식의 스토리 전개도 가능해진다. 그 모호한 경계를 사이에 두고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며 히어로와 빌런은 한 차원 더 성장하게 된다.



자아의 충돌을 통해 정반합의 과정과 성장을 그려낸 애니메이션이 있다. 바로 ‘인사이드 아웃’이다. 디즈니 픽사 스튜디오가 만든 ‘인사이드 아웃’은 라일리라는 11살 소녀가 미네소타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하며 겪는 경험을 그린다. 집에 적응하고, 학교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며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중심이다. 하지만 실제 영화의 주인공은 라일리가 아니라 라일리 내면에 있는 기쁨이, 슬픔이, 소심이, 까칠이, 버럭이 등 다섯 감정이다. 이 다섯 감정은 라일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라일리의 감정 컨트롤 센터에 자리잡고 감정 구슬을 만들며 상황에 맞게 라일리의 감정을 조정한다. 라일리의 감정적 변화와 반응은 모두 이 다섯 종류의 감정구슬이 보내는 화학적 신호다. 쾌활한 라일리의 성격에 맞게 기쁨이가 중심이 되어 별탈 없이 지내오던 감정들은 이사로 상황이 바뀌자 대립하기 시작한다. 


감정들은 라일리가 항상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변화된 환경 때문에 아무리 감정을 조절해도 라일리는 힘들어 한다. 새로운 친구들 앞에서 자기 소개를 할 때면 처음 보는 그들의 눈빛에 부끄럽고 어색하다. 미네소타 이야기를 하며 행복해 하다가도 이제 추억으로 밖에 남길 수 없는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슬퍼진다. 계속 우울해 하는 라일리를 위해 기쁨이는 핵심기억을 모두 기쁨구슬로 바꿔 기쁜 추억만을 떠올르게 하려 한다. 슬픔이는 이에 반대한다. 이전 학교와 친구들에게 대한 그리움 같은 슬픔도 중요한 기억이라 믿기 때문이다. 슬픔이는 급기야 슬픔 구슬을 없애려는 기쁨이와 몸싸움을 벌인다. 기쁨이와 슬픔이는 소란을 피우다 감정 컨트롤 센터에서 튕겨져 나가 라일리의 무의식 세계에 떨어진다. 



소심이, 까칠이, 버럭이만 남은 라일리의 감정 컨트롤 센터는 엉망진창이다. 라일리의 감정은 주체할 수 없이 기복이 심해진다. 라일리는 소심하고 까칠하며 만사에 반항하는 사춘기 소녀가 된다. 그리고 라일리가 지금껏 쌓아왔던 자아는 그녀의 추억과 함께 하나씩 붕괴되기 시작한다. 어린시절 자신을 웃게 해주던 아빠의 ‘원숭이’ 장난이 유치하게 느껴지며 ‘엉뚱섬’이 붕괴하고, 미네소타에 있던 하키팀 친구에게 새로운 팀 메이트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우정섬’이 무너진다. 기쁨이와 슬픔이는 붕괴하는 라일리의 무의식 세계를 뚫고 컨트롤 센터로 복귀하려 한다. 우여곡절 끝에 기쁨이는 센터까지 이어지는 회상 튜브를 발견하지만 슬픔이를 두고 홀로 튜브에 오른다. 라일리가 슬퍼지는 걸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기억의 섬들이 붕괴되며 튜브도 무너지고 기쁨이는 무의식 깊은 곳에 있는 기억 매립지에 떨어진다.



기억 매립지에서 기쁨이는 자신이 없애려 했던 슬픔 구슬을 발견한다. 그리고 매립지에 묻혀 잊혀져 가는 라일리의 기억을 되돌아 본다. 가장 행복했던 하키팀에서의 추억을 어루만지던 기쁨이는 이상한 현상을 발견한다. 친구들에게 헝가래를 받던 추억을 담은 행복한 기억 뒷면에 자신 때문에 게임에서 졌다는 슬픔이 담겨 있는 것이다. 다시 구슬을 어루만지자 그날 밤 홀로 슬퍼하고 있는 라일리에게 부모님이 다가와 위로해 주며 그 슬픔은 다시 기쁨이 된다. 


기쁨과 슬픔은 모두 같은 추억의 일부다. 슬픔이 있기에 기쁠 수 있고, 다양한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존재하며 궁극적으로 삶을 다채롭게 하고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기쁨이는 그제서야 슬픈 추억을 없애는 게 라일리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 믿었던 자신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깨닫는다. 기쁨이는 마음을 다잡아 매립지에서 탈출하고 기억의 섬 구석에서 홀로 슬퍼하고 있는 슬픔이를 찾아 함께 컨트롤 센터로 복귀한다.



컨트롤 센터 앞에 선 기쁨이는 슬픔이에게 감정 조절대를 넘긴다. 주저하던 슬픔이는 조심스레 슬픈 추억이 떠오르게 한다.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미네소타 집과 친구들이 떠오른다. 그제야 라일리는 억눌렀던 감정을 풀어 놓으며 엄마 아빠 앞에서 펑펑 울기 시작한다. 엄마와 아빠는 그런 라일리는 안아준다. 슬픔이는 조심스레 기쁨이 손을 잡고 함께 감정 조절대에 손을 올린다. 라일리는 엄마 아빠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며 포근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라일리 생애 처음으로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감정 구슬이 생겨난다.


자아를 인식하고 살아가는 과정에 충돌과 갈등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충돌과 갈등은 순간의 슬픔과 괴로움의 원인이 되지만 이를 극복하면 성장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이런 성장의 계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더 폭넓고 다채로운 자아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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