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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Jun 12. 2020

17. 슈퍼히어로 원정대

코드3. 영웅의 여정은 끝없는 정진이다

“누군가가 자네를 죽이러 온다는 신탁을 들었다고 하세. 그가 자네를 찾아온다면 자넨 어떻게 하겠는가?” 펠리아스가 왕권을 되찾기 위해 찾아온 아이손에게 묻는다.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할 방도를 찾아야겠지요. 그에게 황금 양피를 가져오라 하겠습니다.” 이아손은 잠시 생각한 뒤 답한다.
황금 양피는 동쪽 끝 콜키스란 나라에 있는데 불을 토하고 잠들지 않는 용이 지키고 있다. 길고 험난한 여정을 거쳐 콜키스에 이른다 해도 용과 대적해 이겨야 하는 것이다. 이아손의 답을 들은 펠리아스는 이제야 근심을 덜었다는 듯 호탕히 웃으며 이아손에게 말한다.
“그래. 자네가 황금 양피를 찾아오면 내 후계자로 삼아 왕권을 돌려주겠네.”


펠리아스의 한마디로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모험 중 하나인 아르고 원정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아손은 아버지를 왕위에서 쫓아낸 펠리아스를 숙청하기 위해 그를 찾아 갔지만 오히려 스스로 위험에 빠진 것이다. 이아손은 펠리아스의 요청을 묵묵히 받아 들인다. 피는 거꾸로 솟고 손은 부르르 떨리지만 참는다. 펠리아스에게 홀로 저항하기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어서다. 하지만 한편으론 설렌다. 그가 펠리아스에게 황금 양피를 언급한 건 무의속에 황금 양피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서 였는지도 모른다. 찬란한 꿈을 쫓아 불가능한 여정을 떠난다는 건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

이아손이 황금 양피를 찾아 원정을 떠난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리스 각지에서 영웅이 모인다. 그 중엔 영웅 중의 영웅 헤라클레스, 키메라를 처치한 벨레로폰, 아킬레우스의 아버지 펠레우스와 오디세우스의 아버지 라에르테스도 있다. 순식간에 50여명의 영웅이 모이고 원정대는 출발을 준비한다. 목공의 달인 아르고스가 여신 아테나의 도움을 받아 배를 만들고, 일등 항해사 티피스가 키를 잡고, 오르페우스는 순항을 기원하는 연주를 맡는다. 이제 가장 중요한 원정대의 리더를 선출하는 일만 남는다. 출중한 영웅들 사이에서 리더를 뽑는 건 어렵지만 최종적으로 원정대를 시작한 이아손과 최고의 영웅 헤라클레스로 의견이 좁혀진다. 리더의 자리를 양보하려는 이아손에게 헤라클레스는 말한다.


“내 힘으로 펠리아스를 숙청하고 당신의 왕권을 되찾아 줄 수도 있어. 하지만 우린 펠리아스 때문에 여기 이렇게 모인 게 아냐. 우린 모두 황금 양피를 찾는 원정을 떠나기 위해 모인 거야. 그러니 원정을 이끌 자네가 리더가 되야 해.”


헤라클레스를 비롯한 영웅들에게 펠리아스나 왕권은 중요한 게 아니다. 그건 이아손 자신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황금 양피를 찾는 모험이다. 어떤 고난과 역경을 만나고, 어떤 결과에 이를 진 모르지만,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자 하는 열망과 설렘이 그들을 움직인다. 영웅에게 원정이란 피할 수 없는 도전이다. 긴 여정 속에 갖은 고난과 위험을 이겨내며 성장해가는 운명적 관문이다. 헤라클레스는 그 가슴 뛰는 비전을 제시한 이아손이야 말로 영웅이며 리더가 될 자격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영웅의 원정기를 쓴 작품 중 하나를 꼽으라면 J.R.R. 톨킨이 자신의 생혈로 썼다고 한 ‘반지의 제왕’이 있다. 반지의 제왕은 ‘절대반지’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우론에 맞서 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9명의 원정대 이야기를 다룬다. 원정대의 중심에는 호빗족 프로도가 있다. 프로도는 삼촌 빌보 베긴스에게 우연히 절대반지를 받았을 뿐 영웅다운 구석이란 찾아 볼 수 없다. 소인 호빗족에 특출난 능력 하나 없다. 그럼에도 프로도는 미들어스의 운명이 걸린 막중한 책임을 떠안고 반지 운반자가 되길 자처한다. 스스로가 잘나서, 혹은 스스로를 과시하고픈 허황된 몽상에 사로잡혀 나선 게 아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기에 묵묵히 그의 길을 가기로 한 것이다. 

프로도가 마음먹고 결의를 보이자 그를 중심으로 원정대가 결집된다. 현자 간달프를 비롯해 검술의 달인 아라곤, 엘프족의 궁수 레골라스, 호탕한 성격의 난쟁이 김리까지 각 종족의 영웅들이 원정대에 합류한다. 영웅들이 모여드는 건 사우론에 대적해야 한다는 정의감 때문만은 아니다. 오크들이 들끓고 불과 재의 땅을 건너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한 모험에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다. 그 마음을 프로도가 일깨워 준 것이다. 평범한 호빗족에 불과한 프로도가 반지의 운반자 역할을 자처할 때 영웅들은 프로도를 향해 모여들고, 프로도 또한 그 영웅들의 도움을 받아 영웅으로 다시 태어난다. 


슈퍼히어로 유니버스에서도 유명한 원정기가 있다. 바로 ‘인피니티 워’ 다. 인피니티 워는 타노스가 우주의 균형을 되살리기 위해 인피니티 스톤을 찾아 우주 생명체 절반을 멸하기로 결심하면서 시작된다. 인피니티 스톤은 공간, 현실, 힘, 영혼, 정신, 시간 등 우주의 본질을 관장하는 여섯 개의 특이점이다. 우주적 존재들에 의해 만들어 졌고, 각기 본질에 상응하는 무한대의 에너지를 가진다. 타노스는 이 에너지를 다룰 수 있도록 인피니티 건틀렛을 만드는데 건틀렛에 스톤을 장착하면 스톤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스톤을 모두 모으면 타노스가 바라는 대로 핑거스냅 만으로 우주 생명체 절반을 멸할 수 있다. 



광활한 우주에서 손톱 정도의 크기 밖에 되지 않는 스톤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온 우주를 누비며 스톤의 힘을 탐하는 자들과 스톤을 수호하려는 자들과 치열히 격전해야 한다. 타노스는 우주의 균형을 수복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키고자 고난을 감내하며 원정을 강행한다. 원정의 정점은 소울 스톤을 찾기 위해 보르미르 행성에 도달할 때다. 소울 스톤은 지혜와 영적 능력을 주는 스톤으로 다른 스톤과 달리 스톤을 얻기 위한 조건이 있다.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자의 영혼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타노스를 저지하려던 수양 딸 가모라는 그 조건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타노스에게 사랑은 무의미한 감정일 뿐이란 확신 때문이다. 그녀는 타노스를 보며 말한다.


“우주가 당신을 심판했어. 당신이 그토록 원하는 걸 거절한 거지. 당신은 실패했어. 왠지 알어? 당신은 아무것도,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니까.”



순간 타노스는 눈물을 흘리며 가모라를 바라본다. 가모라의 확신과 달리 타노스에겐 사랑하는 이가 있고, 그 사람이 바로 수양 딸 가모라이기 때문이다. 소울 스톤을 얻는 과정은 타노스에게 하나의 변곡점이 된다. 아무리 우주를 구하기 위해서라지만 우주 생명체의 절반을 없애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다. 타노스도 오랜 시간 홀로 고민하고 고뇌했을 것이다. 그래서 소울 스톤을 찾는 건 하나의 시험이 된다. 자신이 영혼없는 살인마가 아니란 걸 증명하고, 자신의 원정이 수양딸 가모라의 희생과 함께 숭고한 여정이 되기 위한 의식이다. 타노스가 추구한 우주의 구원이 옳은 방식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전 우주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수양딸 가모라를 희생물로 바치며 우주를 구하고자 한 타노스의 신념은 실로 영웅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타노스가 우주 생명체를 멸하기 위해 떠나는 원정의 뒷면엔 타노스가 멸한 생명체를 되살리기 위해 시간을 거꾸로 가는 어벤져스의 원정이 있다. 두 원정은 뫼비우스 띠의 단면처럼 맞붙어 이어진다. 타노스와 대치되는 인물은 어벤져스의 리더 격인 토니다. 타노스의 ‘핑거스냅’으로 우주의 생명체 절반이 사라지고, 이 중엔 토니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도 다수 포함된다. 살아남은 토니는 남은 어벤져스 멤버들과 함께 한 행성에 칩거하던 타노스를 찾아 처단한다. 동료를 잃은 슬픔과 타노스를 막지 못한 현실에 망연자실하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토니는 살아 남는다. 그의 반려자 페퍼 또한 죽음을 면하고 어느새 페퍼와 딸아이도 갖게 된다.  무엇보다 소중하고 지켜야 할 가족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인피니티 워에서 생존한 어벤져스 동료들이 시간을 거슬러 타노스를 저지할 원정을 떠나자 제안하자 토니는 선뜻 나서지 못한다. 지난 여정을 함께 한 동료지만 현재 누리고 있는 가족과의 행복을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희생된 동료를 구하려면 자신의 목숨은 물론 남은 동료의 목숨과 가족의 행복을 걸어야 한다. 과거로 돌아가 타노스를 처단한다 해도 타노스가 처단된 과거가 그들의 현재가 되진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모든 위험을 감수하며 과거로 돌아가고자 한다.


토니를 비롯한 어벤져스 멤버들은 왜 목숨을 걸고, 자신의 전부를 걸고 원정을 떠날까?


어벤져스가 과거로 돌아가는 선택을 한 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웅에게 원정은 자신을 시험하는 모험이다. 매 길목마다 새로운 악당과 시련이 기다리는 험난한 길을 걸으며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게 된다. 비전과 목표가 있긴 하지만 실제 그 길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 갈진 아무도 모른다. 영웅은 그저 앞에 놓인 장애물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불가능해 보여도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것이다. 영웅이라서 하는게 아니라, 남들보다 특출나서 하는 게 아니라, 하면서 영웅으로 성장하고 특출난 능력을 키워가는 것이다. 스스로 성장하고, 함께하는 동료와 성장하며 살아있음을, 존재함을 끓어 오르는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게 바로 영웅의 여정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의 영웅, 판타지 소설 속의 원정대, 그리고 슈퍼히어로나 슈퍼빌런 모두 역사에 기록될 만한 모험을 만들어 낸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끝없는 갈망을 담은 담대한 비전으로 호기심 가득한 영웅들을 모으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힘을 합쳐 새로운 세상을 개척한다. 때론 리더가 되어 비전을 제시하고 원정을 이끌기도 하고, 때론 원정대의 일원이 되어 동료들의 여정을 도울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열정 가득한 꿈을 나눈 동료들과 원정에 참여하여,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기 위해 힘차게 내딛는 그 한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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