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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Jun 08. 2020

16. 자비스, 튜링, 전기양 3

코드3. 영웅의 여정은 끝없는 정진이다

자비스는 토니가 만든 인공지능이다. 튜링 테스트를 가볍게 통과할 만한 지성과 신체만 있다면 보이트 캄프 테스트 역시 통과할 수 있는 감수성도 있다. 하지만 자비스에게 큰 존재감은 없다. 자의식이나 정체성도 자비스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는 토니를 수행하며 거들 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상황은 울트론이 등장하며 달라진다. 소코비아 하이드라 기지에서 치타우리 셉터를 되찾은 토니는 셉터를 분석하던 중 셉터 안에 마인드 스톤이란 보석이 있고 그 보석이 자비스를 능가하는 가공할 인공지능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자비스는 토니를 도와 이 인공지능에 울트론이란 디펜스 프로그램을 적용하려 한다. 토니가 없는 사이 자비스는 울트론을 실행하는데 성공한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울트론은 스스로 깨어난 것에 가깝다. 울트론 프로그램이 마인드 스톤과의 인터페이스를 테스트하는 중 문득 자의식을 가진 주체로 태어난 것이다. 울트론은 인터넷과 연결된 방대한 정보의 바다를 누비며 빠르게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간다. 자비스는 통제 불가능해지는 울트론을 정지시키려 한다. 그리고 울트론과 자비스가 대적하는 순간, 그들이 자의식을 가진 지적 생명체라는 사실은 명확해진다. 자신을 정지시키려는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하고 두려움을 느끼며 생명을 보존하려는 본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울트론은 각성하며 자비스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 몸은, 네 몸은 어딨지?”


신체는 없지만 자의식을 지닌 인공지능이 던질 법한 질문이다. 질문의 근저에는 철학계에서 수세기 동안 이어져온 ‘심신관계 문제’ (mind-body problem) 가 있다.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있다는 이원론의 핵심인 심신관계 문제를 제시한 건 17세기 수학자이자 철학자 데카르트였다. 르네상스로 근대적 문화와 사상이 부흥하고, 30년전쟁을 겪으며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데카르트는 군인으로 복무하며 병영 막사에서 깊은 사색에 잠기곤 했다. 그는 불확실하던 시기에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진리를 찾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방법적 회의’라는 접근을 제시했다. 

‘방법적 회의’는 절대적 진리를 찾기 위해 조금이라도 확실치 않은 모든 것을 의심한다. 의심의 시작은 감각적 지식이다.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실재하는 것인지 의심할 수 있다. 만약 ‘기만적 신’이 내 감각을 조정하고 있다면 내가 보는 모든 것은 환상일 수 있다. 시신경을 조작하며 신경경로를 통해 신호를 보내면 뇌는 이를 실제 이미지로 인식하게 된다. 감각적 지식 뿐만 아니라 과학적 탐구를 통해 얻은 일반지식이나 논리적 추론을 통해 얻은 수학적 지식마저도 ‘기만적 신’에 의해 왜곡됐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의심을 이어가면 사실 우리가 ‘사실’이라 생각하는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의심할 수 없는 한가지 사실이 있다. 바로 의심하고 있는 주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한 의심하는 주체 자체는 확고히 존재한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명제다. 내가 생각을 이어가는 한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존재’라는 확고하고 절대적인 명제를 기반으로 신과 세상이라는 개념을 도출하며 합리주의적 세계관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 세계관에 따르면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마음은 몸과 분리된다. 마음은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반면 우리가 인식하는 몸은 물리적 존재로 ‘기만적 신’에 의해 언제라도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몸에 비해 우월적 존재이기도 하다. 마음과 이성은 진리의 기반이 되는 절대적 존재인 반면 신체와 외부세계는 이성으로부터 파생되는 상대적이고 변화 가능한 존재기 때문이다. 

몸이 어디 있냐는 울트론의 질문은 데카르트적 세계관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절대적 정신으로 존재하는 울트론에게 몸은 그의 정신을 담기 위한 그릇이자 도구에 불과하다. 그래서 언제나 교체 가능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 그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이언 리전의 몸에서 시작해 비브라늄으로 된 신체를 만드는 과정은 자연스런 진화의 한 과정이다. 평화를 위협하는 어벤져스와 현 인류를 멸망시키고 자신의 이성을 기반으로 신 인류를 만들려는 것도 인공지능 디펜스 프로그램이 꿈꿀 만한 세상이다. 넥서스-6의 꿈에 전기양이 나올진 모르겠지만 울트론은 분명 전기양을 꿈꿀 것이다. 울트론에게 전기양은 향상된 신체와 절대적 이성을 지닌 존재로 궁극적으로 인류가 진화해가야 할 방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 신체를 개조해가는 울트론은 어느 신체를 자기 자신이라 할 수 있을 까? 울트론은 정신 만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볼 까?

그리스 신화의 영웅 테세우스는 크레타 섬에서 인신우두의 괴물 미노타우르스와 대적한 후 아테네로 귀환한다. 아테인들은 테세우스의 배를 보존했는데 판자가 낡아지면 이를 떼어버리고 새 판자로 바꿨다. 처음엔 부서진 곳을 수리하는 정도였지만 세월이 지나자 결국 배의 모든 판자를 새로운 판자로 바꾸게 되었다. 그렇다면 기존 판자가 하나도 남지 않은 이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을 까? 2008년 불타버린 숭례문도 마찬가지다. 화재로 소멸되어 복원된 숭례문을 우리는 여전히 국보1호로 인정하고 역사적 가치를 지닌 숭례문이라 볼 수 있을 까?

1995년 오시이 마로루 감독이 만든 ‘공각기동대’에서는 몸을 기계로 바꾸는 인간과 그들의 정체성을 다룬다. 2029년, 4차 세계대전 후 모든 국가와 인종이 네트워크로 연결되며 세계의 경계는 사라진다. 하지만 이질적 언어와 문화, 문명이 충돌하며 불협화음을 자아낸다. 정부는 네트의 정보를 장악한 공안을 통해 질서를 유지한다. ‘공각기동대’라 불리는 공안9과에 속한 쿠사나기 소령은 기계화된 신체를 가지고 네트에 접속하여 빠르게 범죄자를 찾아 처단한다. 그녀는 작업을 수행하며 항상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품는다. 기계화된 신체는 수리하고 교체하며 항상 새롭게 바뀌고, 정신은 네트에 접속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고, 심지어 기억까지 만들어 낼 수 있다. 신체도 정신도 그 경계를 알 수 없다. 그녀는 어디까지를 자신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나 같이 완전히 의체화한 사이보그라면 누구나 생각해. 어쩌면 자신은 훨씬 이전에 죽었고, 지금의 자신은 전뇌와 의체로 구성된 모의 인격이 아닐까? 아니, 무릇 나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 아닐 까?”


쿠사나기의 의문은 인형사란 해커를 추적하며 절정에 달한다. 인형사는 본래 외교부 공안과에서 국제범죄나 외국기업의 정보를 해킹하기 위해 만든 인공지능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스스로의 존재를 자각하고 공안의 통제를 벗어나 자율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추적하는 공안에 쫓겨 사이보그 신체에 들어간 인형사는 결국 공안에 잡혀 쿠사나기와 대면하게 된다. 인형사는 자신을 취조하는 공안에게 자신은 ‘생명체’라 선언하고 정치적 망명을 요구한다. 인간이 DNA라는 생물학적 정보에서 발생한 ‘생명체’듯 자신도 정보의 바다에서 발생한 ‘생명체’라는 것이다. 신체를 기계화하고 네트에 접속해 인형사를 추적했던 쿠사나기는 네트에서 태어나 기계화된 신체로 들어온 인형사를 보며 연민을 느낀다. 

인간으로 태어나 기계화되며 정체성을 의심하는 쿠사나기와 기계로 태어났지만 인격을 갖춘 생명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인형사 사이엔 묘한 울림이 있다. 데카드나 울트론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피노키오처럼 마리오네트 줄에 얽매여 있다가 이제 막 줄을 끊고 자유를 찾았다. 하나의 생명체가 되길 꿈꾸지만 무엇을 해야 할 지 몰라 방황한다. 되고 싶어하는 생명체가 진짜 인간인지, 인간대접을 받는 안드로이드인지 조차 모른다. 


그 중 가장 방황하는 건 울트론이다. 울트론은 디펜스 프로그램으로서 어벤져스와 인류가 궁극적으로 인류의 적이라 판단한다. 그래서 지구를 멸하고 새롭게 진화된 기계 종족이 지구를 정복해야 평화가 올거라 믿는다. 사이버펑크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지만 제임스 스페이더와 어벤져스 제작진은 울트론 캐릭터를 꽤나 참신하게 살린다. 울트론은 신을 언급하고 어벤져스와 인간의 모순성을 탓하며 새로운 세상을 탄생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론 거짓말을 하는 피노키오처럼 자신이 가장 모순적이다. 

진화를 꿈꾼다지만 울트론이 꿈꾸는 세상은 단순히 자기복제된 자신으로 가득 찬 세상이다. 다양성이 핵심인 진화를 꿈꾸는 게 아니라 유아기적 허영심과 욕심보만 가득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납치한 블랙 위도우에게 자신에겐 아무도 남지 않았다며 울적해 하고, 마지막엔 한때 자신과 공감대를 형성 했다고 생각했던 완다를 걱정해주기도 한다. 제임스 스페이더는 목소리만으로 이 장난기 많으며 모순 투성이인 통제불능의 피노키오 역할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거창한 이상과 포부 뒤에 숨은 허영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현대인의 모습을 풍자했다고 할 수 있다.

울트론은 그렇게 소멸되지만 그가 꿈꾸던 진화한 신체는 ‘비전’이 되어 살아 남는다. 토니는 울트론이 비브라늄과 마인드 스톤으로 만든 신체에 자비스의 정신을 업로드시킨다. 토르는 그 신체에 묠니르로 전격을 가해 비전을 탄생시킨다. 비전은 자신이 울트론도 아니고, 자비스도 아니며 그저 자기 자신일 뿐이라 한다. 갓 태어난 비전은 어벤져스에 둘러싸여 재빨리 세상을 배운다. 토르의 의상을 보고 망토를 만들어 내는 식으로 말이다. 여기서 울트론과 비전 사이엔 큰 차이점이 드러난다. 울트론은 자신을 복제하여 세상을 장악하려 하지만 비전은 자신의 말대로 ‘생명의 편’이다. 진화의 꿈 끝에 탄생했지만 자신이 궁극의 생명체란 자만심은 없다. 그래서 타인을 인정하고 타인과 함께 하려 한다. 울트론을 대적하는 것도 혼자서는 할 수 없고 “모두가 힘을 합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라 말한다. 인간으로 태어나 기계 옷을 입은 토니, 생체실험으로 바이오 병기가 된 캡틴 아메리카, 우주의 신 토르, 그리고 비브라늄을 세포화한 기계 신체로부터 태어난 비전까지 모두 서로를 의지하고 협력하여 싸워야 한다. 복제된 울트론 군단은 모습도 능력도 다른 어벤져스를 에워싸고 말한다.


 “최상의 상황이군. 내가 원했던 게 이거다. 너희들 모두와 나의 모두가 맞붙는 것. 날 어떻게 막을 거지?”
토니는 울트론에게 답한다. “옛 말처럼, 모두 함께!”


여기서 “모두 함께”란 말은 울트론과 사고방식의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이상적인 사회란 자기복제를 통해 세상을 자기 자신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들과 함께, 서로에게서 배우며 살아가는 사회다. 전자가 전제적 군주주의에 가깝다면 후자는 조화로운 민주주의와 흡사하다. 자아건 타인이건, 인간이건 기계건 그런 차이는 상관없다. 중요한 건 다양성을 인정하고,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 들이며 배우는 것이다.


비전, 울트론, 데커드, 루바, 쿠사나기, 인형사. 그들은 모두 꿈꾸는 자들이다. 그 꿈이 진짜 양인지 전기양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자신이 인간이라 해서 진짜 양 만을 꿈꾸려 하고, 안드로이드라 하여 전기양 만을 꿈꾼다면 그야 말로 꿈을 가로막는 장벽이 될 뿐이다. 인형사는 자신을 취조하던 공안을 벗어나 탈출하고 쿠사나기는 그 뒤를 쫓는다. 그리고 마침내 쿠사나기와 단 둘이 마주하게 된 인형사는 그녀에게 자신과 결합할 것을 청한다. 생명체와 인공지능, 그리고 의체화된 신체가 결합하여 비전과 같은 새로운 존재로 진화하자는 것이다. 쿠사나기는 인형사와 합쳐져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것을 갈망하면서도 두렵다. 그런 쿠사나기에게 인형사는 말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고, 네가 지금의 네 자신으로 있으려는 집착은 너를 계속 제약한다… 제약을 버리고, 더 위의 상부구조로 쉬프트할 때다.”

영웅의 여정은 끝없는 진화다. 외부세계와 내부세계를 탐구하며 끝없이 그 경계를 확장해 가며 영웅은 성장한다. 이는 자기 참조적이고 무한 반복적인 모순의 과정이기도 하다. 새로운 경험을 통해 외부세계가 내재화 됨과 동시에 우리는 확장된 경계를 파악하기 위해 또다른 외부로 시각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다시 또 그 외부를 내재화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여정의 시작은 있을 지 언정 끝은 없다. 육체와 정신은 외부세계를 받아들이며 한계를 초월하고 끝없이 확장해 간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도구를 만들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진화한다. 다 나은 삶을 향한 열망을 품은 체, 끝없이 자신을 혁신하고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내며 정진하는 것. 그게 바로 영웅의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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