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질적인 화에 대한 내 공포보다, 엄마 신세에 대한 이해가 앞서다.
월요일 저녁, 식사를 하고 오지 않은 남편을 위해 급히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탱글탱글한 면발은 갓 넣은 면을 집게로 몇 번 들어 올려줘야 완성될 수 있다. 인덕션 아래 서랍장에 있어야 할 집게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설거지를 하고 있는 엄마 근처 어딘가에 집게가 있을 가능성이 짙은데, 이상하게 망설여졌다. 집게를 씻고 있는지, 혹은 씼었는지, 그렇다면 어디에 있는지 물으면 되는데,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찾고 싶었다. 찾는다고 싱크대 옆 건조대를 뒤적이거나, 싱크대 안을 내다보면, 내게 무얼 찾느냐 물어볼 게 뻔했기에 슬그머니 건조대로 가 건조대 안을 눈으로만 살폈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인기척을 느낀 엄마는 내게 대번 뭘 찾느냐고 묻는다. 엄마와 함께한 서른 다섯 해 동안, 엄마가 뱉는 말 안에 담긴 뉘앙스를, 슬프지만 아주 정확하게 알아채는 능력을 가진 나는, 직감으로 여기에서 집게를 찾는다고 답하면 신경질적인 “여기 있냐!”는 말이 돌아올 것임을 알았다. 답을 하지 않았다. 정말, 내가 집게를 꼭 찾고 싶었다. 엄마만 그 자리에 없다면 아무 문제없이 찾을 수 있고, 찾아 낼 것이고, 탱글탱글한 면을 만들 부푼 기대로 즐거이 면을 올렸다 내렸다 할 것인데, 엄마는 그 찰나를 역시나 참지 못하고 “아, 말을 해! 말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피하고자 애를 썼으나, 그 애씀이 무색하게 피하고자 했던 순간을 정확히 맞닥뜨렸다. 우두망찰하는 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내게 소리지르는 거냐고, 왜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거냐고 따져 묻고 싶은 마음, 하고 싶은 말들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엄마에겐 단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같은 공간에 있으나 마치 같은 공간에 없는 냥, 혼자 노래를 흥얼거리며 아무 일 없다는 듯 의미 없이 엄마 옆을 스쳐 지나가 주는 것이 내 나름의 복수였다. 이런 난데없는 폭격을 맞을 때마다 내가 어땠었는지, 폭격의 순간들을 곱씹어 보기도 했다. 장면들을 떠올릴수록, 내가 왜 기를 쓰고 다정한 엄마가 되려 하는지 또 되고 싶은지 납득이 갔다.
이청준의 「소문의 벽」, 전짓불 공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내게도 그런 공포가 있다. “너 뭐 찾냐?”라는 말과, “안방 화장대 서랍에 하얀 봉투 있어. 그거 가져 와”와 같이 내게 무언가를 찾아서 가져오라는 지시이다. 엄마는 이 두 상황에서 폭발적인 화를 쏟는다. ‘단번에’와 ‘신속하게’를 좋아하는 엄마에게 무언가를 찾느라 두리번거리는 장면은 불편함을 야기하고, 자신이 위치를 말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찾아봤는데도 없어. 못 찾겠어.’라는 말은 “아, 거기 있지 왜 없어? 아 거기 있냐!”라며 엄마의 분노를 자극한다. 엄마가 말한 위치에 없었을 경우에도 물론 사과는 없었다. 그래서 난 지금도 누가 무언가를 찾아오라고 하면 숨이 가빠지고 혼미해진다. 못 찾으면 어쩌지, 라는 생각으로 뒤덮이니까.
폭격의 장면이 대체로 유사한데, 이번 폭격은 다른 점이 딱 하나 있었다. 내겐 남편이 있다는 것. 무방비 상태로 맞는 감정 폭격이 내게 얼마나 폭력적인 일인지 그래서 나를 어떻게 침잠시키는지를 또렷이 보고 있는 남편이 있다는 것. 이건 분명 잘못된 게 맞다는 걸 동의해주는 남편의 토닥임에 나도 고개를 끄덕여줄 수 있었다. 너만 알아준다면, 난 괜찮아. 한 명이라도 알아준다면, 정말 괜찮아. 케케묵은 분노마저, 토닥임 한 번에 자취를 감춘 느낌이었다. 나에게는 그래, 남편이 있었다.
이 생각에 이르자 도돌이표다. 나는 엄마와의 상황을, 그 속에서 내가 느끼는 생각과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지만, 그걸로 나는 위안을 삼고 얼마간의 해소를 한다지만, 엄마는 불편한 마음을 누구에게 털어놓고 이해받을 수 있을까. 엄마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데에는, 엄마를 불편하게 만든 외부적인 어떠한 상황이 이유가 됐을텐데. 그로 인해 어지러운 마음이 톡 쏘는 말로 나온 걸텐데. 그런 상황과 마음을 털어놓을 누군가가 없는 엄마라는 사실이 떠오르면, 내가 느꼈던 분노와 불쾌감은 불온하게 느껴지고, 철없는 투정으로 느껴진다.
결국, 결말은 늘 같다. 아무렴 혼자인 엄마보다야 내가 더 힘들겠나. 엄마의 불쌍함과 처량함을 내가 이길 수 없다. 그러므로, 엄마는 옳고 나는 그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