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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명혜 Apr 06. 2022

밥 한 그릇

 저녁을 준비하며 심심풀이용으로 틀어 놓은 텔레비전에선 또 한바탕 “먹자판”이 시작될 모양이다. 한국 방송이니 정말로 그림의 떡이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현장을 찾아간 리포터의 한껏 고조된 목소리는 마치 잔칫상이라도 받은 듯 들떠있다. 음식 냄새 하나 전해지지 않는 화면 밖 세상에 있건만 그 흥분된 마음이 내게도 전해져 그 자리에 초대를 받은 듯 설렌다. 얼른 저녁 준비를 하고 화면 앞에 앉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끓기 시작한 쌀뜨물에 된장을 풀고, 감자, 양파, 호박 숭덩 썰어 후루룩 한 번 끓여 두고, 파와 쑥갓은 물에 흔들어 송송 썰어 놓는다. 쑥갓과 파는 온실에서 기른 것인데도 향도 진한 것이 겨우내 식탁을 풍성하게 했다. 반찬을 덜어내는 동안 텔레비전 화면은, 어느새 리포터도, 요리를 한 사람도, 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도 숨길만큼  뭉게뭉게 흰 김으로 온통 덮여 있다. 곧 커튼이 걷히듯이 김이 사라지면, 오늘의 요리가 등장할 터이다.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볼륨을 올리고 왁자한 그 잔칫상에 나도 앉았다.


 오늘 주인공은 “밥”이었다. 주걱으로 가마솥을 뒤적이기 시작하니 다시 흰 김이 뿜어져 올라온다. 수증기를 뱉어낸 솥 안엔 쌀과 잡곡 몇 가지 말고도, 검정콩과 설깃 자른 고구마와 뽀얗게 익은 밤과 늙은 호박고지와 노랗게 색이 고운 은행까지…,  오랜만에 보는 귀한 밥이다.  


요즘 들어 밥이 다이어트나 건강을 따지는 현대인들에겐 종종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기도 하고, 햇반 같은 것들 때문에 더 쉽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난 따뜻한 밥 한 그릇의 엄청난 힘을 믿는다. 화면 속의 화려한 밥과는 달라도, 나 어릴 때 외할머니는 늘 늦게 퇴근하는 아들을 위해 이불속에 밥을 묻어 두셨고, 아버지의 이른 출근에도 어머니는 늘 새로 밥을 지으셨고, 한 떼로 몰려가 사람 수보다 적게 칼국수 룰 시켜도 늘 공깃밥도 함께 주셨던 학교 뒷문 칼국수 집 할머니의 밥은 그저 밥 한 그릇이 아닌, 지치고 힘든 마음까지 토닥여 줄 사랑이 함께 했다고 믿는다. 


 화면 속엔 주걱을 든 아주머니가 꽤 우묵한 밥그릇에 입심만큼 넉넉하게 밥을, 사랑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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