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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sum Jan 30. 2024

전지적 시엄마 시점 1

아직 밖이 어두운데 고양이가 시끄럽게 잠을 깨운다 밥이 없나? 더 자고 싶지만 사람이든 짐승이든 배고프면 안 되지 고양이 밥그릇이 비어있는지 확인하러 가봐야겠다 눈을 비비며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거실로 나선다 


배고픈 건 생각만 해도 싫다 어린 시절 보릿고개에 먹을 수 있는 풀이란 풀은 죄다 뜯어다가 희멀겋게 죽을 끓여 먹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먹어도 먹어도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파 현기증이 올라오던 그때 어느 동네 큰집으로 심부름을 가게 되었다 큰집에는 커다란 개가 한 마리 묶여 있었는데 나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그런데 개밥그릇이 얼마나 큰지 먹든 저렇게 양껏 먹어봤으면 좋겠다 싶었다 개밥에 이끌려 가까이 가보니 안에 하얀 저것은 쌀이다 집은 개도 쌀을 먹는구나 개가 부러웠다 차라리 개로 태어났으면 이렇게 배가 고프지는 않을 텐데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나중에 쌀을 쌓아두고 항상 배 터지게 먹을 거야 절대로 쌀이 떨어지게 하지 않을 거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배고프지 않게 할 거야 


어린 시절 간절했던 그 바람은 나의 뼈에 새겨져버렸나 보다 고양이가 야옹 하고 울기만 해도 나는 자동적으로 배고픈가 생각한다 아침에 일어나 나온 손자가 안녕히 주무셨어요 인사만 해도 배고프겠네 밥 먹자 화답한다 아들이 밥을 안 먹고 출근하는 게 그렇게 마음이 쓰일 수가 없다 시장에서 떡을 사다가 얼렸다 아침에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한 개씩 가방에 넣어주었다 그렇게라도 끼니를 챙기길 바랐는데 며칠 가지고 다니더니 안 먹고 상하니 더 챙기지 말라고 한다 불편하다 며느리도 아침을 안 먹는다 간헐적 단식인가 뭣인가 한다고 아침을 안 먹고 점심도 늦게서야 챙겨 먹는다 불편하다 남편은 젊을 때 교통사고로 장수술을 크게 몇 번 했던 터라 유착이 생겨 장운동이 활발하지 않다 먹는 양을 본인이 잘 조절해야 한다면서 양껏 먹질 않는다 불편하다 손자 녀석은 타고나길 먹성이 없게 태어났다 너무 말라서 볼 때마다 불편하다 어떻게든 저 녀석을 살을 찌워야 하는데 자꾸 짜증을 낸다 먹는 거 좀 그만 물어보란다 그래도 멈출 수가 없다 


아침이 되면 가장 먼저 쌀을 씻어서 고슬고슬하게 밥을 짓는다 밥 짓는 냄새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 이때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듯 충만해진다 식구들이 먹기에 좀 많은 양이지만 괜찮다 식은 밥이 쌓여있어야 배고플 때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급하게 먹을 수 있다 이 식은 밥이 없으면 또 그렇게 불안하다 햇반인가 머시긴가 며느리가 쟁여놓는 즉석밥이 있지만 그건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질 않는다 희한한 물건이다 생긴 건 영락없는 갓 지은 밥인데 이상스럽게 먹어도 속이 차는 기분을 느낄 수가 없다 며느리는 밥 좀 쌓아놓지 말라고 잔소리를 해대지만 어쩔 수 없다 너는 떠들어라 하고 나는 또 쌀을 한 공기 더 퍼담는다. 


오늘은 손주들이 좋아하는 김치볶음을 해야겠다 지엄마가 해주는 김치볶음보다 내가 해주는 김치볶음을 좋아한다 나는 고기도 듬뿍 넣고 참기름 들기름 여유 있게 들이부어서 기름이 지글지글하게 만든다 다시다도 넣고 깨도 양껏 넣는다 어린 시절에 이 깨가 너무 귀해서 나는 나중에 커서 절대로 쌀과 함께 이 깨를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이 정도 때려 넣으면 맛없으래야 맛없을 수가 없다 며느리는 자꾸 다시다 쓰지 말라고 잔소리를 해대지만 다시다에도 영양가가 있겠지 먹어서 나쁠 건 없다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다 기왕지사 먹는 거 맛있게 먹어야지 역시나 할머니 김치볶음 맛있다고 입맛 없다던 손녀가 밥을 한 공기를 비운다 행복하다 행복이 뭐 별거 있나 맛있게 먹고 배부르면 되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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