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87
⠀아무런 걱정과 불안감 없이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만 싶을 때가 있다. 해방감을 두 손에 가득 움켜쥐고, 쌓였던 삶의 짐을 마음껏 내팽겨둔 채 홀로 먼 곳에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고만 싶은 그런 순간. 목적지가 어디인 지도 정확히 모르는 열차에 무작정 몸을 실은 뒤, 무거운 잡념을 그 속도의 품 속에서 떨쳐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어쩌면 서글픔에 비참히 파묻혔음을 알리는 그런 딱한 순간. 혼자 감내하기엔 너무도 큰 외로움이 닥쳐버렸거나, 구차해져만 가는 삶에 지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는 마냥 그 절망 속에서 홀연히 도망치고만 싶은 생각이 들기 마련이라서. 긴 해방감과 삶의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만 있다면, 그저 잠시나마 일상의 권태 속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생각이 항상 내 머릿속을 군림하고 있다. 사방이 막힌 이곳은 그러한 해방감 자체를 일축해버리기에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을 뿐이었다. 어느 순간, 갑작스레 이곳에선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이전의 자유로움이 어렴풋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며 오랫동안 숨죽였던 뇌를 거세게 때렸다.
⠀문득 어릴 적 생각이 났다. 고작 열두 살이었던 나는 뭣도 모르는 긴 해방으로의 여정에 몸을 실었었다. 중국의 상하이(上海)에서 출발해 저 먼 북부 도시인 심양(沈阳)으로 향하는 열차는, 무려 스물여섯 시간이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꽉 채운 하루를 꼬박 넘기고도 두 시간이나 더 가야 비로소 땅에 발을 디딜 수 있는, 어쩌면 여행 속 또 하나의 유려한 여행임이 분명했다. 비행기를 타고 빠르게 갈 수도 있었던 여정이지만, 우리는 일부러 해방감과 여유로움을 곁에 둔 채 드넓은 땅만이 풍기고 있는 정취를 온전히 느끼기 위해 날지 못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우리가 탔던 중국의 고속 열차는 요금에 따라 좌석이 나뉘었는데, 우리가 예매한 좌석은 가장 비싼 특급 침대칸인 롼워(软卧)였다. 통상 푹신한 침대칸이라 불리는 롼워는 두 개의 2층 침대가 마주 보고 있는 4인 1실로, 문을 잠글 수 있는 객실이었다. 상대적으로 시설이 쾌적하고 공간이 확실히 분리되어 있는 만큼 요금이 굉장히 비싼 편이었다. 비행기 요금과 맞먹는 수준이었으니 두말할 것 없었다. 우리는 딱딱한 의자칸, 푹신한 의자칸, 딱딱한 침대칸의 불편함과 어수선함을 뒤로 하고 롼워만의 사사로운 푹신함에 몸을 맡겼다. 어쩌면 우리는 자유로운 해방으로의 먼 길에 큰맘 먹고 큰돈을 투자했던 것이었다.
⠀우리는 그 좁은 칸 안에서 남몰래 우리만의 해방감을 조용히 호흡했다. 열차의 속도감은 그동안 머금고 있던 고달픔을 토해내라고 종용하는 듯했다. 창밖으로 살포시 보이는 향락의 도시는 갈수록 그 질감이 싸늘하게 바뀌어가고 있었으며, 우리는 그 빠른 속도 속에 마음을 빼앗긴 채 우리만의 느긋함을 맘편히 즐겼다. 네 명이서 다닥다닥 붙어 좁은 테이블 위에서 소소하게 카드게임을 즐기던, 추위의 쓸쓸함은 창 너머에 두고 따뜻함만을 온종일 나눴던 좁은 칸 속의 우리. 아득히 바라보고 있으면 삶의 여유와 정취를 느낄 수 있었던 좁은 창밖의 황량한 풍경. 그리고 조용할 틈을 쉽게 주지 않겠다는 듯이 객실 문 너머로 들리는 시끌벅적한 낯선 언어들까지. 지금도 선연히 떠오르는 그때의 우리는, 낯선 땅에 동요되어 탁한 공기와 함께 해방감을 자유로이 향유하고 있던 방랑자들이 틀림없었다. 각자의 힘든 과업 속에서 벗어나 어쩌면 완전한 해방을 누리게 된 열차 속 방랑자들은, 저마다의 기쁨을 그 속에서 조용히 머금고 있었다. 누군가는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한 과업을 잠시 내버려 둔 채로 그 열차에 몸을 실었고, 초등생이었던 나는 어쩌면 학업의 조그마한 부담 속에서 해방된 채로 몸을 실었던 것이었다. 삶의 고달픔이 먼지처럼 쌓여있던 누군가의 어깨는 그곳에서만큼은 말끔함을 유지했는데, 낯선 언어와 인간들 속에서 그 뒷모습만을 졸졸 따라다녔던 나는 꼭 든든한 나무를 앞에 두고 걷는 것만 같았다.
⠀그 속에서 우리는 여러 색채의 과일을 깎아 먹으며 해방의 달콤함을 다채롭게 나눴다. 선명한 핑크색을 띠던 용과의 새하얀 과육을 맛있게 파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슴슴한 맛이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달콤함의 언저리에 있는 이상한 맛 또한 혀 위에서 나뒹굴며 흥미로움을 자극했다. 이와 더불어 좁은 침대 위에 모여앉아 저마다의 호흡으로 서로를 부대끼던 기억, 좁은 테이블 위에서 현지에서 산 수상한 빵을 조심히 나눠 먹으며 끼니를 때우던 기억, 그런 즐거움 속에 점점 추위와 어둠 속으로 접어들고 있던 좁은 창밖의 모습까지. 우리는 스물여섯 시간이라는 긴 여정 동안 빛과 어둠을 모두 등 뒤에 둔 채 지고한 행복을 맛볼 수 있었다. 일상의 고단함으로부터 벗어나 조금의 안정을 지닌 채 열차에 몸을 싣고서, 그 속도의 품 속에 단조로운 삶에서 오는 권태를 마음껏 벗어던졌던 우리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누워만 있는데도, 그날 나의 육체는 계속해서 저 위쪽의 어디론가로 향했다. 바깥의 해가 다 저물도록 가만히 누워 음악을 듣고, 과일을 먹고, 잡담을 하고, 카드게임을 하고, 수상한 빵을 먹으며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기만을 되풀이하는데도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단연코 말하건대 그것은 진정한 해방이 틀림없었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여행이 돼버렸던 그 속은 해방이라는 두 글자 말고는 도무지 표현할 수 없는 황홀의 공간이었다. 내 발밑으로 지나는 철길이 진정한 해방으로 향하는 길임을 그 당시에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2층 침대에 누운 채 내다보는 창밖의 황량한 도시 속 모습은 그저 황홀하기만 했는데, 잠시 눈을 붙였다 일어나 다시 밖을 내다보면 그 황홀함의 색채는 금세 다른 빛깔로 바뀌어 있곤 했다.
⠀나 또한 <데미안> 속 싱클레어와 같이 넘치는 만족과 풍요로움 속에서 숨 쉬도록 태어난 사람은 아니었다. 궁핍함의 심연으로부터 계속해서 빠져나와야만 하는 스릴감과 서러움이 삶 속에 필요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그런 풍요로움의 결여 속에서 애써 어디론가로 멀리 떠났던 해방으로의 길은 결코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분명히 그 열차 속의 우리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그때만큼은 불안감이 엄습해올만한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 열차에 몸을 실은 순간, 우리를 뒤쫓는 불안과 고통들은 그 속도를 못 이기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 것이 확실했다. 나는 창밖으로 그 모습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후로 스물여섯 시간 동안 쉴 새 없이 달리며 그 고통의 잔여물은 점점 추위에 얼어가는 창문과 함께 더욱 빠르게 와해됐다. 좁은 객실 속은 순수한 해방감만이 그 텁텁한 공기를 품어내며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목적지에 서서히 다다르며 열차 속을 차지하고 있던 해방의 감격은 머지않아 곧 사라질 것만 같았지만, 그 열차에서 내린 순간에도 그 감격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은 채 외려 우리 뒤꽁무니를 밟았다. 이후에도 그 즐거움은 계속해서 우리의 발자국을 따라 퍼져나가며 우리의 남은 여정을 끝까지 뒤쫓았다.
⠀그때의 순수한 해방감을 다시 만끽할 수 있을까. 그리운 여정 속 누렸던 긴 해방의 감격이 도저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보다 더한 행복을 과연 내가 누릴 수 있을까. 든든한 나무처럼만 느껴졌던 그가 지금도 과연 나를 앞장서며 말끔한 어깨를 내보일 수 있을까. 시간이 야속하게도 너무 빠르게 흘러버렸다. 나의 급한 걸음이 그걸 증명하고 있으며, 난 이제 좀처럼 누군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지 않는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이제는 스스로 정확히 알아버린다. 어쩌면 그때의 그 해방감은 내가 열렬히 좇으려 한 바가 아니었기에, 단지 순순히 따라다니는 와중에 내게 불현듯 찾아와준 감정이었기에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 것이 아닐까. 단지 어설프게나마 그때의 해방감을 느껴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 그때만큼의 감격에 이제는 결코 닿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 열차 속의 우리를 떠올릴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나를 뒤덮는다. 다시는 그 순간을 느낄 수 없어서, 그때의 그 열차만큼 시간이 너무도 빠르게 흘러버린 것만 같아서 몹시 서글픈 감정에 휩싸여 버린다. 그때의 기억이 외딴곳 속의 웅크리고 있는 지금의 나를 전율케 한다. 다시 해방으로의 긴 여정에 무작정 몸을 싣고 떠나고만 싶어서. 홀가분한 몸으로 낯선 땅 위를 한참 동안 기웃거리며 여기저기를 쏘다니다 긴 밤을 지새우고만 싶어서. 이 외딴곳에서 벗어나는 순간,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때만큼의 순수한 해방을 갈구하러 떠날 것 같다. 결의에 찬 발걸음을 무작정 어디론가로 내딛고, 이전의 옹색함을 가리기 위한 당돌함을 꺼내 보이며 해방의 달콤함을 온전히 누릴 것만 같다. 얼른 그 순간이 오기를. 하루빨리 욕망으로 가득 찬 발자국을 여기저기에 마음껏 남기는 날이 오기를. 해방으로의 길로 홀연히 떠나는 자유로운 나날만을 간곡히 기다리며 오늘도 나는 묶여있는 꿈속에서 격렬히 헤엄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