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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요일 Dec 08. 2022

네모난 타인과 감춰진 조각들에게

D-345

네모난 사진들 앞에 동그랗게 몸을 웅크린 사람들. 화려하게 꾸며진 사각형 속 각진 타인을 바라보며 그 앞에서 상대적인 박탈감과 열등감을 동그란 입으로 토해낸다. 정체 모를 우울증, 스스로를 괴롭히는 온갖 불쾌한 감정에 시달리며 그들은 좀처럼 네모난 틀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어느샌가 그들에겐 사치 경쟁이 되어버린 우리만의 자그마한 전시 공간. 친근하고도 정겨운 예술가들의 소탈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던 그 속은 이제는 싸늘한 공기만이 맴돈다. 편안한 옷차림으로 서로의 작품을 관람하러 온 사람들 사이에서 수줍게 피어나던 말풍선들은 온데간데없이 희미해졌고, 이제는 모두가 휘황찬란한 옷을 어정쩡하게 차려입은 채 일말의 소통 따위 없이 자신의 작품만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액자의 크기와 높낮이, 사진 속에서 느껴지는 행복감의 정도와 밝기 등을 재차 확인하며, 작품명에 수정이 필요하지는 않은지 다시금 살핀다. 허나 그러한 예술가들 뒤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등진 채 숨죽여 울고 있다. 마침내 그 전시관 속은 시기와 질투, 그리고 허망함만이 공간을 차지한 채 작품들을 더럽혔고, 사람들은 남들의 전시물에 비치는 스스로의 처량한 모습을 기꺼이 인정하고 말았다.


⠀전시관에 작품을 내놓기 전, 몇몇의 예술가들은 창작에 있어 깊은 고뇌에 빠진다. 당연하게도 형편이 없거나 더러운 작품을 내보일 순 없기에, 큰 공을 들여 본인들의 일상을 기꺼이 일구어낸다. 행복감이 충만하고 여유로움이 잔뜩 묻어나도록, 어설픈 부분은 잘라내고 나머지를 화려하게 꾸며낸 뒤에야 비로소 한 점의 작품이 탄생된다. 구워진 빵의 먹음직스러운 부위만을 사각 틀로 잘라내어 예쁜 접시에 올리듯, 네모난 틀 속에 아름다움과 고상함을 가득 욱여넣고서 그곳에 잘 닦은 렌즈를 갖다 대기 마련이다. 그렇게 빚어져 손님 앞에 놓인 빵 속에는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달콤한 앙금이 들어 있다. 허나 몇몇의 사람들은 그 근사한 모양이 나오기 위해 버려진 썩은 빵조각과 말라비틀어진 빵 부스러기들을 알아채지 못한다. 애석하게도 또 한 번 자신들의 삶을 먹다 떨어진 빵 부스러기들과 동일시하며, 몸을 웅크린 채 눈물 적신 빵을 꾸역꾸역 삼켜낸다.


⠀우리가 모두 공유하는 거대한 식탁 위에는 고단한 삶의 흔적은 좀처럼 올라오지 않는다. 남몰래 생활고에 시달리거나 갈등을 빚어 인간관계에 허덕이는 일상은 결코 요리되지 않는다. 그 위에는 행복한 주말만이 올라온다. 한숨만 나오는 평일 같은 요리가 올라오는 대신,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주말 속에 여유로운 향기를 풍기는 것만 같은 음식만이 그 위를 차지한다. 지나가다 그 식탁에 잠시 들린 사람들은 그러한 근사한 플레이팅에 완전히 속아 넘어가고, 꾸며진 남들의 앙그러진 요리들을 보며 자신들의 소박한 접시를 탓하고 만다. 그렇게 그들은 조용히 그 자리를 물러난다. 어떤 이들은 날카로운 포크의 끝으로 그 음식들을 푹 찌르고 그곳을 도망친다. 감춰진 허점을 찾아보려, 나와는 비교되는 그 요리를 헝클어트리고 더럽히며 스스로의 모습을 애써 부정해 본다. 결국 남겨진 식탁 위에는 허망함과 공허함의 냄새들이 가득 풍긴다. 편안하게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식탁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세련된 옷차림과 근사한 플레이팅의 요리들만이 그 공간을 차지했다. 이제 그곳은 좀처럼 섣불리 다가가기가 힘든 불편한 식사 자리가 되어버렸다.

 

⠀한 인간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도구들을 빼앗긴 채 외딴곳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식탁에 걸쳐 앉아있긴 하지만, 남들의 근사한 접시들만을 마냥 바라보며 침을 흘릴 뿐, 마땅히 할 것이 없다.  지겹게도 전시관을 들락날락하며 벽에 새롭게 걸린 남들의 작품들을 수시로 살펴보는 잊힌 예술가. 그에게는 더한 고통이 뒤따를 게 분명해 보인다. 그의 작품은 더 이상 그곳에 걸려 있지 않다. 너무도 오래된 탓에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 전시관 창고 한구석에 처박혀 있다. 그를 제외한 온 세상의 뛰어난 예술가들의 손재주만이 근사한 흔적으로 벽에 남아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을 산다. 정성껏 아름다움을 곳곳에 수놓은 그들의 작품들은 극심한 모방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그들의 섬세한 손끝이 마침내 뛰어난 전시물로 탄생되기 위해 참아내야 했던 즐거운 순간들과 귀찮은 감정들을 온전히 따라하고만 싶어진다. 허나 벽에 걸린 그 작품들은 잊힌 예술가를 조롱하듯 벽 뒤로 숨어버렸고, 결국 그의 눈에는 단단한 벽의 차가움만이 가득 보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절망감을 빌려 잠시 외로움을 토해내긴 했지만, 그의 동공을 빼곡히 채워 넣은 남들의 화려함은 결코 선망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저 희망이었다. 한 줄기의 희망. 그도 그들처럼 평범한 예술가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충분했다. 당장 전시관에 내놓을 수 없을 뿐, 훌륭한 그의 작품들은 그의 머릿속에서 태어나고 있었다. 네모난 타인의 삶을 보며 동그란 희망을 머금었고, 외려 절망과 허망을 예술로서 홀로 그려냈다. 작품을 내놓지 못해 남들의 것에만 집중해야 하는 탓에 소외감이 마음 한 편에 자리했지만, 박탈감과 열등감만은 애써 밟아 죽였다. 따라서 그의 마음속에는 흥미로움이 쌓여갔다. 다양한 예술가들의 삶을 바라보고 그들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그의 느긋한 태도는 보잘것없는 상실감을 누그러뜨렸다. 그 공간은 모두가 속아주기로 한 암묵적 약속이 존재함이 분명했다. 관람객 전체가 그물 모양을 눈알에 칠한 채 타인의 작품을 바라봤고, 그 전시물들의 뒷면에도 감춰진 먼지들이 묻어 나왔다. 모두가 작품의 허구성을 못 본 채 하는 전시 공간이었다. 그러한 의도를 알아챈 그는 홀가분한 옷차림과 가벼운 심장을 지닌 채 그곳을 맘 편히 둘러보기로 했다. 왠지 모를 불쾌함을 온전히 감수하고 즐기기로 한 그였다.


⠀모두가 눈알을 바꿔 낀 채 그곳에 발을 들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뻑뻑함을 감당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러한 고통과 정면으로 맞설 가치를 못 느꼈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결국 전시관을 빠져나와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다시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채 조용히 제 삶을 찾아 나섰다. 남들의 전시물을 보며 괜한 부러움을 가지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품은 그들이었다. 노골적으로 작품을 꾸미고, 서로 경쟁하듯 재료의 단가를 올리며 부를 선망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예술가들의 모습이 그들에겐 꽤나 거슬렸다. 전시관 속 갈라진 벽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흙먼지를 마신 그들은 더 이상 그곳을 방문할 이유가 없었다. 머지않아 그곳이 무너질 것임을 그들은 일찍이 눈치챘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삶을 품에 꼭 껴안고 공허함만이 자리할 네모난 전시관으로부터 재빠르게 도망쳤다.


⠀이래 봬도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꾸며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 보길 원한다. 그곳에 안주하고 있음에도 눈을 마주 보며 하는 진실된 대화를 은밀히 갈구한다. 가려지지 않은 상대와의 포옹을 갈망하고, 따뜻한 목소리를 그리워한다. 허나 사회는 점점 그러한 줄을 끊어냈고, 결국 자그마한 전시 공간이 그들 가운데 우뚝 서서 주변의 사람들을 안으로 불러냈다. 그러고는 모두를 예술가로 만들어 작품들을 편하게 전시할 수 있도록 했다. 처음에는 후줄근한 옷차림의 예술가들과 방문객들로 붐비었지만, 갈수록 저마다의 세련됨이 온몸 구석구석에 붙여져 남몰래 주위 사람들을 쿡쿡 찔러댔다. 작품 속에서도 그러한 경쟁심이 묻어 나왔다. 어느새 그곳은 서로를 만질 수 있는 유일무이한 공간이 되어버림과 동시에 서로의 주머니를 흘낏 살펴보게 되는 일종의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그 속에서는 위축된 어깨들이 슬슬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본질을 망각한 채 그 속에서는 진실된 마음들이 전해지지 않고 뿔뿔이 흩어진다. 바깥을 나와서야 상쾌한 공기를 마실 수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많은 이들이 그 공간의 품에 오롯이 몸을 맡긴다. 그 속에서 대놓고 서러움을 털어놓는 사람은 좀처럼 발견하기가 어렵다. 모두가 화려한 미소를 애써 머금는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들어가기 전 진통제를 맞는다. 또 다른 이들은 그 주위를 완전히 피하고서 그들만의 산뜻한 공기를 마시러 떠난다. 그들은 모두 네모난 타인의 감춰진 조각들을 기어코 발견한 인간들이다. 그들이 작품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여유로움이 한껏 묻어 나온다. 허나 안타깝게도 아직 네모난 예술가들을 등진 채 숨죽여 동그란 눈물을 터뜨리는 사람이 존재한다. 각진 빵 속에는 거짓된 앙금이 들어 있다. 하물며 그 이전에는 못난 빵조각들이 수없이 바닥에 버려졌다. 이 사실을 모두가 눈치채야만 한다. 우리는 반쯤 눈을 감고 무심한 시각으로 작품들을 바라봐야 한다. 아니면 그곳을 뛰쳐나와 참된 세상의 꽃내음을 만끽해야 한다. 사치 경쟁에서 탈피해 모두가 진실된 미소를 보이는 기약 없는 전시회가 되기를. 더 이상 위축된 어깨가 그 속에서 보이지 않기를. 모두가 동그란 눈으로 타인의 네모난 삶을 잘라내며 감상하기를 바라며 오늘도 잊힌 예술가의 눈은 어슴푸레 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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