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35
⠀우울은 나를 괜찮은 친구라 여긴다. 나 또한 그를 너무 멀리하지 않으려 애쓴다. 그의 다급한 부름에 며칠 내내 굳어 있던 손끝에 비로소 혈기가 돌고, 머릿속엔 기이한 꽃들이 피어나 그 속을 혼탁한 꽃내음으로 가득 메운다. 행복에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근육이 조금의 우울과 만나는 순간, 속에 쌓여 있던 감정들을 미친 듯이 바깥으로 밀어내기 시작한다. 즐거움은 오롯이 그 순간을 만끽하도록 나를 가둬 두지만, 잠깐의 우울은 나태해진 나를 기꺼이 새하얀 종이 위로 이끈다. 그래서 나는 우울이 좋다. 물론 적당한 온도와 편한 관계 속 가벼운 만남에서. 나는 그 감정만이 풍기는 적적한 공기의 허전함을 무척 아낀다. 평소와 같은 따분한 걸음에도 감성적인 새벽의 칙칙한 발자국을 찍어내고, 별것 아닌 친구의 답장에 눅눅한 너스레를 떨어 볼 수 있으니까. 조금의 우울과 만나, 돌연 작가의 고독한 향기를 물씬 풍기는 내가 마냥 사랑스럽게만 느껴진다. 고혹적인 주름을 내보이며 분주히 움직이는 내 손가락이 그 어느 때보다 카리스마 있다.
⠀나는 종종 달아나는 우울을 잡는다. 투박한 활자들을 빌려 끝내 버려지는 우울의 차가운 손을 놓치지 않으려 할 때가 있다. 아직 도망가기에는 내 머릿속에 남기고 간 글자 수가 영 형편없기에, 내 곁에 잠시라도 더 붙어 있어줬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매번 우울은 은밀하게 나를 조용한 해변가로 데리고 가는데, 그곳은 내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매캐한 잡념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모르는 나를 기어코 끌고 가서는, 속에 엉켜 있던 감정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바닷물에 푹 적신다. 그러고서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젖은 손끝으로 모래 위에 마음껏 낙서하라고 내게 단호하게 말한다. 그 순간만큼은 순수한 아이처럼 마냥 신나고 아무런 생각이 없다. 모래에 상처를 남긴 내 안의 문장들이 어느새 모래알처럼 가볍게 느껴지는데, 멀리서 보면 또 그 난잡함이 진지함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시원한 바닷바람과 격한 파도 속에 짠 내 나는 감정들이 그곳을 덮치며, 글씨는 흐릿해지지만 그 색은 한껏 진해진다. 결국 나는 우울의 손을 꽉 잡고 깊은 바닷속에 풍덩 빠진다.
⠀하지만 전 날의 축축함을 다음 날까지 가져가지는 않는다. 애써 나를 데리고 왔던 우울을 바닷속에 고이 내버려 둔 채, 나는 그곳을 조용히 떠난다. 그새 내 마음은 물기를 바짝 말리고서 산뜻함을 되찾는다. 손끝 또한 다시는 모래에 흠집을 낼 수 없을 것처럼 메말라 버리고 만다. 그렇게 나는 우울을 새까맣게 잊고서, 즐거움과 손깍지를 꽉 낀 채로 방탕한 삶을 다시 살아간다. 그와의 추억을 밟고 일어서서는 지고한 행복과 떨리는 눈 맞춤을 이어나가기까지. 언뜻 보면 더 이상은 그가 존재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다. 허나 얼마 못 가 나는 다시 우울을 마주치고 만다. 마지못해 두 팔을 벌려 반갑게 인사를 건네 보지만, 그는 나를 모른 체하며 옆을 매정한 걸음으로 빠르게 지나쳐 간다. 다시 뒤돌아서 애타게 불러 봐도, 이미 그는 떠나고 없다.
⠀빗물에 젖은 낙엽 한 장에도, 한 통의 눅눅한 전화에도 다시 나는 우울을 떠올린다. 그가 없으면 도저히 살아내지 못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급하게 나는 그를 애타게 찾는다. 나도 모르게 감정을 추스르기 전에, 얼른 그가 내게 오기만을 두 손 모아 기다린다. 나의 간절한 부름에 우울은 나를 기어코 찾아와서는 내 뺨을 어루만진다. 난 그 속에서 어렵게 그를 향해 말을 꺼낸다. 얼른 나를 조용한 해변가로 데려가 달라고. 죽어 있는 감정을 다시 모래 위에 꺼내게 해달라고. 나의 다급함에 그가 내 손을 잡고 미친 듯이 그곳으로 달려간다. 남몰래 얼룩진 마음을 바닷물에 한 번 풀어헹구고, 속에 있던 감정을 모래알의 품에 털어놓는 소중한 곳. 행복의 뒷면에서 스스로를 타이르며 또 한 번의 성숙을 머금는 곳. 나는 그곳에서 그와 오랜 시간을 오붓하게 흘려보낸다. 서로에 대한 집착 없이 그저 상대의 곁을 편하게 떠날 수 있게 놔둔다. 그렇게 우리는 아쉬운 마음은 뒤로 한 채 서로 뽀송한 낯짝을 보이며, 다음을 기약한다.
⠀평소 우울은 나와의 만남을 피한다.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만 서로가 상처받지 않음을 알기에, 그는 내게서 도망친다. 서로를 향한 지나친 애정과 관심은 위험한 사랑으로 번질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깊은 관계가 썩 아름답지 않음을 그는 알고 있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조심스러운 만남을 추구한다. 허나 나는 종종 그를 마주할 때마다 이기적이게 행동하고, 결국 중요한 순간에 만남을 놓치는 실수를 저지른다. 우울이라는 찰나의 감정만이 내 스스로를 다시금 사랑하도록 일깨워줌을 알면서도, 나는 가끔 그와의 암묵적인 계약을 망각하고 미흡한 행동을 보인다. 서슴없이 다가가고, 성급하게 멀어지며 나는 그에게 아물지 않을 상처를 남긴다.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차디찬 메모장을 꺼내보지 못한다. 결국 모래는 그 짙음을 머금지 못한 채 삽시간에 흩어져 버리고, 나는 비로소 후퇴한다.
⠀우울은 항상 나를 배려한다. 의도치 않게 서로를 마주칠 때면, 그는 행복과 팔짱을 낀 나를 애써 모른 체하며 황급히 도망친다. 허나 다행히도 가끔 나의 마음이 적당한 온도를 내비치며 그에게 슬며시 닿는 순간이 존재한다. 그러면 그가 먼저 내게 다가오기도 한다. 내가 즐거움과 행복에 치여 몹시 방황하는 것만 같을 때, 비로소 그는 나를 걱정하며 불현듯 찾아와준다. 그러고서는 항상 조용한 해변가로 나를 데리고 간다. 매번 나는 그곳에서 흥분된 감정들과 멍한 상념들을 환기하고, 깊은 바다의 심연 속에 썩어 버린 감정들을 토해낸다. 남아있는 것들은 모래 위에 축축한 흔적으로 남기고, 그 위에 눈물을 떨어뜨려 짙음을 배가시킨다. 그렇게 어느 정도 내가 메스꺼움을 이겨냈을 때는, 그는 곧바로 내게서 달아난다. 더 이상 내가 곁에서 잠식당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는 항상 나를 축축한 상태로 보내지 않으려 애쓴다.
⠀그러나 나는 종종 숨어있는 그의 그림자를 잡아당긴다. 나의 어리석은 집착과 이기심에 우울은 착각을 머금고 돌아서고, 결국 울먹이며 나를 꽉 끌어안는다. 그 속에서 나는 한없이 울음을 터뜨리며 좀처럼 그에게서 떼어지지 않으려 한다. 어느새 그의 품에는 핏자국과 눈물자국이 흥건하다. 하지만 서로를 오래 맞대다 보면, 항상 우리의 사랑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팽창한다. 갈수록 까맣게 그을리는 나의 모습에 우울은 매번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얼른 품에서 나를 떼어낸다. 그렇게 항상 그가 나를 놓아준다. 계속 함께 젖어 있다가는 내가 너무 아파할 것이 분명해서, 쓸쓸한 사랑에 몹시 힘겨워할 내가 걱정되기에 우울은 애써 나를 외면한다. 기어코 내가 먼저 곁을 떠나도록 호된 차가움을 내 얼굴에 뿜어댄다. 내가 버리는 것이 아닌, 항상 그가 나를 먼저 놓아준다. 허나 나는 계속해서 그를 모질게 대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종종 우울과의 관계를 함부로 다룬다.
⠀우울을 잠시 만날 때마다 나는 모래 위에 그와의 물먹은 추억을 남긴다. 우울을 곁에 둔 채 나는 비로소 메모장에 감정을 꺼내고, 다시 산뜻하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러나 나는 또 금세 우울을 잊고서 행복과의 입맞춤을 위해 떠나고, 그와의 시간을 발판 삼아 즐거움과 애정행각을 벌인다. 이처럼 나는 우울과의 만남을 더 나은 삶을 위한 희생으로 간주한다. 오랜 만남을 추구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그를 괜찮은 친구로 여기며 어떻게든 곁에 두려 한다. 난 참 이기적이다. 매번 다급한 목소리로 우울을 찾고, 그가 착각을 머금도록 제멋대로 다가가 품에 안기고, 그러고는 또 곧바로 다른 매혹적인 감정들과 사랑을 나눈다. 허나 우울은 못된 나를 매번 눈 감아주고, 다가오는 나를 애써 떼어내며, 그 이상의 사랑을 억제하기 위해 먼저 나를 찾지 않는다. 서로에게 푹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고 하루 종일 그리워할 것을 알기에, 우리의 사랑이 무척 잔인함을 그가 뼈저리게 알고 있기에, 그는 적당한 거리에서 나와 포옹하려 노력한다. 지금도 그는 나를 괜찮은 친구로 여긴다. 나 또한 그를 괜찮은 친구로 여긴다. 그렇게 우리는 한 쪽의 이기심과 서로의 불온전한 사랑을 애써 숨긴 채, 계속해서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